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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 1리는 현재 6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파출소와 지방도로 변의 면소재지동, 장터마을, 서원마을, 연정마을, 양지말, 길만동이 그것인데, 면소재지동은 면사무소가 들어서면서 새로 생긴 곳이요, 장터말은 일제시대에 장이 서면서 만들어진 자연마을이다. 조선시대까지는 그 외 4개의 자연마을이 합쳐 한 마을을 형성하였다. 면소재지 동은 공암리 합동정류소와 파출소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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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일년 행사중 가장 중요한 날이 바로 초파일 석가탄신일이다. 갑사에는 수많은 신도가 찾아와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 몇주전부터 계룡산 입구에는 연등이 걸리고, 초파일이 되면 아침 일찍 갑사 경내에 연등을 내건다. 방문객들에게는 갑사 앞에서 한끼 꺼리쯤 되는 절편을 나눠주고, 신도들은 절 마당에 들어서자 마자 앞마당의 어린 석가모니 상에 물을 부어 목욕을 시키는 관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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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청 서기는 생전에 관직에 나아가거나 이름이 크게 떨쳐지지는 못했지만 그의 기이한 재주와 명철한 예견력, 교유인물, 문인, 후손들의 노력으로 사후 추증 및 증시의 은전을 받았다. 우선 그의 증직(贈職)은 시호를 받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일로서 융희 4년(1910)에 정2품인 ‘자헌대부규장각제학(資憲大夫奎章閣提學)’으로 증직되었다. 이 후 같은 달 ‘문목(文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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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공암에서는 벼농사 이외에도 각종 농산물을 심고 거둔다. 각종 농산물이란 나물, 채소, 과일 등으로 마을 사람들은 내다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 집에서 소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규모로 경작하고 있다. 겨울을 제외한 계절동안 내내 수확할 수 있는 것들로는 상추, 파, 열무, 콩 등이 있고, 봄에는 감자, 고구마 등을 수확하며, 여름에는 보리, 가을에는 봄에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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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절기마다 철마다 마을잔치를 벌였던 기억이 있다. 매년 보릿고개를 걱정하는, 여유롭지 않은 삶이었기에 마을잔치는 모두가 조금씩 추렴해 다같이 즐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농사일의 중요 시기때마다 이런 행사가 함께해 농사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다음 작업을 준비하는 때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먹고살기 좋아지니, 마을잔치가 더 줄어들었다. 정월에 괴목대신제와 삼거리 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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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을에 오래 살다보니 건너집도 가족같은데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 동갑친구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들이다. 2007년 중복날에는 1941년생들의 동갑계 모임이 있었다. 마을회관에서는 한참 복달음 잔치가 벌어졌는데 동갑계 모임을 가진 이들은 마을 옆의 ‘갑사골가든’ 식당에서 오리고기를 굽고 있다. 어찌된 일인가 싶어 물었더니, 다들 바빠서 모이기 힘든데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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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 1리의 7개반 주민이 모두 참여하는 마을 총회는 매년 12월경에 개최된다. 다른 동네에서는 ‘동계’나 ‘대동계’라 하기도 하는데 중장 1리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마을마다 각각 독립적인 마을계가 있다. 1950년대 초 행정적으로 ‘중장 1리’가 편성된 후에야 마을 총회라는게 생겼다. 마을계는 연반계의 성격이 강하고, 총회는 마을의 전반적인 운영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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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새마을 지도자를 역임하고 있는 서수철씨는 동회장, 이장과 함께 마을의 3대표이자, 이장 부재시의 대리이며, 부녀회장님과 함께 마을의 대소사의 실무를 맡고 있다. 서수철 씨도 역시 이장님과 같은 이천서씨로 이후 이장님이 될 첫 후보자로 지목되고 있는데 이렇게 마을을 사랑하고 마을을 위해 준비된 지도자 서수철씨의 공암에서 생활했던 어린시절 이야기와 마을을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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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마을 동쪽에는 높이가 20척에 너비가 12척, 깊이 30척 되는 공암굴이 있다. 공암이란 마을 이름도 ‘구멍 바위[孔岩]’라고 부르는 이 굴에서 유래하였는데 이 굴 하나에 여러 가지 이야기와 설이 난무하다. 이곳은 원래 조선 후기 분청사기를 만들기 위한 석회의 원산지로서 재료를 채취하느라 파여지기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 굴의 모양이나 겉표면을 보면 돌을 떼어난 자국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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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농촌 마을에는 마을 입구나 마을 한가운데에 커다란 둥구나무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농경사회에서는 이것이 마을의 재앙을 막아주는 당산나무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하여 모시고 제사를 지내주었던 것인데, 공암 1리에도 그럴법한 나무가 연정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둥구나무가 처음 이곳에 세워지게 된 이유에는 공암의 지세와 무관하지 않다. 공암이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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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1리에는 매년 음력 2월 1일이 되면 마을이 주체가 되어 칭칭부인 김순이 위령제를 지낸다. 그것은 후사 없이 죽은 김순이 부인의 제사를 지내주는 것인데, 그의 제사를 마을에서 공동으로 지내게 된 연유는 이렇다. 지금부터 약 50년 전 ‘칭칭이’라는 별호로 불리던 김순이(金順伊)[1910년생] 부인이 이 마을에 살았다. 부인은 당시 약 300평 정도의 땅을 구입하여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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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8일에는 반포면민체육대회가 있었다. 매년 이맘때쯤 반포면사무소에서는 장소를 제공하는 반포초등학교와 협의하여 체육대회의 일자를 정하여 각 마을에 통보한다. 21개 리(里)가 참여하게 되는 이 반포면민 체육대회는 3개의 행정리가 한 팀이 되어 승부를 겨루는 모임으로 면내 모든 행정마을 단위의 축제의 날이기도 하다. 각 마을은 행사를 치르기 전날부터 대회 연습 또는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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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의 고청봉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의 동쪽 용수천 제방 밑에는 탑할머니가 있다. 탑할머니의 모습은 시냇가에서 발견된 묵직한 크기의 돌을 타원형으로 둥그렇게 쌓은 후에 탑의 상부에 넓적한 판석을 깔고 그 위에 사람의 두상과 유사하게 생긴 타원형의 둥근 머리돌을 올려놓고 머릿돌을 광목으로 둘러싼 형태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 상부의 모습이 솥뚜껑과 비슷하다. (탑의 크기는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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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지난 1700여년간 불교는 한국인의 정신적 귀의처였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동양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고 각각의 나라에서는 그 민족의 특성에 맞게 서로 다르게 성장해 왔다. 한국의 불교는 동양의 어느나라 보다도 불교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있는 사찰마다 절의 상징과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현존하고 있다. 한국인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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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마을을 이끌고 있는 이장님은 서만호씨다. 공암리에 고청 서기가 터를 잡으면서부터 마을에는 이천서씨가 많이 살게 되었고, 현재 그들은 공암마을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이보다 1982년에 한 마을에서 갈려 나간 공암 2리에는 더 많은 약 80%의 가구가 이천서씨 일 만큼 공암리에는 이천서씨가 많이 산다. 이 두 마을의 역대 이장 명단을 조사해 본 결과 90%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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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 입구에서 서원마을로 약 50미터 들어가면 마을의 산 증인 서인호 씨 댁이 나온다. 서인호(남, 82세) 씨는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수립 이후 첫 행정사무가 시작되면서부터 마을의 대표자로 지금까지 마을과 함께 하고 있다. 서인호 씨 댁의 대문은 현재 검은 철 대문으로, 대문 바로 밖에는 서인호 씨의 유일한 농토가 자리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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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1리에 탑할머니를 제외하고 또 하나의 신앙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마을의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선돌이다. 돌은 남쪽에 1기, 북쪽에 2기가 세워져 있는데 이 선돌들은 언제부터 세워졌는지 그 건립시기를 알 수 없고, 특별히 부르는 이름도 없다. 공암리에서는 이 돌을 ‘수구(水口)막이’로 인식하고 있다. 수구막이란 풍수지리학적으로 이로운 기운을 옮기는 물(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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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이발소는 약 5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의 미용실이 남녀를 불문하고 가는 곳이라면 이발관은 남자들만의 헤어샵이다. 공암이발소 는 반포면사무소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골목을 따라 내려간 첫 번째 골목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골목은 현재도 옛 장터라고 불릴 정도로 반포면의 작은 시장이 섰던 곳이다. 시장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아직도 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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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장마을 의 진중용씨는 1927년생으로 일제강점기에 10대를 보내고 18세에 해방을 맞았다. 그 시절의 고생담이야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대대로 양반집안이란 자부심에 살았어도 세상이 뒤바뀐 일제 식민지 시대에 집안의 전통을 지키기는 힘들었다. 어려서는 계룡면사무소 옆동네인 유평리의 계룡보통학교를 다니며 공부했는데 그 시절 인근에서 유일한 교육시설이었기에 계룡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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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리 사람들은 예로부터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벼농사가 주업이라도 다른 지역은 왠만하면 고추나 포도 등 과실업 또는 특용채소를 상품작물로 삼아 재배하여 부수익을 얻고 있는 실정인데 공암은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상품작물을 경작하는 사람이 없다. 최근 이런 것에 의문을 갖고 연정말에 사는 김응천씨는 토마토를 재배하기 위해 하우스를 짓고 몇 년째 시도하고 있지만 풍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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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 1리의 마을길은 무척 운치가 있다. 농촌 풍경이 아주 넓게 펼쳐져 있어서도, 도로가 잘 닦여 있어서도, 인도가 잘 나있어서도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까지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마을이 정겹고 운치 있게 느껴지는 것은 공암 주민들의 살아있는 숨결을 정답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암은 몇 사람 살지 않는 작은 시골마을이 아니다. 공암 1리만도 약 600여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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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1리 버스정류장에서 남쪽으로 닿아있는 산언덕을 오르면 이천서씨 선산이 있다. 선산을 가기위해 언덕에 오르면 바로 1966년에 세워진 서장호 처 부안임씨의 효부정려가 있다. 여기에서 바로 시작되는 대전-공주간 23번 국도에 놓여진 육교를 타고 공청봉 자락산으로 건너가면 선산과 재실, 고청서기 묘지가 나온다. 고청 서기 묘지는 선산 분묘 중 가장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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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장마을 은 양반마을이라 풍장을 못쳤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농사짓는 마을에 두레가 없을 리가 없다. 열두대징이의 각 마을별 두레는 본래의 역할과 별도로 마을 사람들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상징과 같았다. 중장1리에서는 갑산소와 갑사동 두레가 유명했는데, 하대리 마룻골 형님두레를 제외하면 갑산소와 갑사동 두레패가 세기로 유명했다. 두레가 나서는 날에는 풍장패가 요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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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암1리는 이천서씨 집성촌이다. 공암리는 크게 1리와 2리로 나뉘어 있는데 이 중 입향조 고청 서기[1523-1591]가 처음 들어와 정착한 곳은 공암 1리이다. 그러나 대를 거듭할수록 정착민의 수가 늘어나면서 북쪽으로 조금 더 깊숙한 산 아래 분지에 공암 2리가 형성되었고 좀 더 큰 도로가에 인접한 공암 1리에는 타성의 성씨들이 좀 더 많이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니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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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이 아름다운 충현서원의 정경이 더 아늑하게 느껴지고 항상 정결을 유지하는 것은 충현서원 사당 곁에서 살며 서원을 돌보고 있는 조광시·홍사윤 부부가 있기 때문이다. 두 부부가 충현서원을 돌보게 된 것은 충현서원이 사단법인으로 등록되던 1969년도 부터이다. 조광시씨는 당시 충현서원 원장을 하던 초대 충청남도지사 성낙서씨와 공화당 의원이던 이병주 의원의 인맥으로 서원지기로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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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할머니탑 옆에는 서너 아름되는 팽나무 한 그루가 있어 할머니탑과 함께 신목(神木)으로 위함을 받아 왔다. 그래서 할머니탑과 팽나무가 있었던 곳을 ‘팽나무거리’, ‘탑거리’ 등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팽나무는 1989년 태풍으로 뿌리가 뽑혀 죽었다고 한다. 당시 나무가 쓰러지면서 탑을 덮치는 바람에 탑신의 반이 훼손되어 할머니탑을 새롭게 보수했다. 이 내용은 아직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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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정월 14일 저녁이 되면 탑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것은 공암1리 마을제사의 하나로서 다음날인 정월대보름 행사와 함께 맞물려 마을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역사가 오래된 제사이다. 이것을 ‘탑할머니제’ 또는 ‘탑제’라 하는데 탑제는 남쪽선돌 제사→북쪽선돌 제사→탑할머니 제사→소지(燒紙)의 순서로 진행된다. 마을제사는 저녁 7시 정도에 시작되지만 그 준비는 일찍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