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8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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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先史 |
영어의미역 | Prehistoric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선사/석기 |
집필자 | 박보현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문자로 기록된 역사가 없었던 시기.
[개념]
역사학에서 시대구분을 할 때 문자로 쓰여진 기록이 있는 시기를 역사시대로 부르는 데에 대하여 문자로 기록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 시기에 대하여 쓰는 용어이다.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적 방법을 통한 발굴에서 확인된 유구(遺構) 와 유물(遺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고고학에서는 날 달린 도구[利器]의 재질에 기준을 두어서 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로 구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삼한사회에 대한 중국 측 기록이 남아 있고, 일부는 후대 기록이지만 고조선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어서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일부가 선사시대에 포함시키면 될 것 같다. 아울러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선사고고학이라고도 한다.
[칠곡 지역의 구석기시대]
석기시대는 날을 만들 때 숫돌의 사용 여부에 의하여 순수하게 깨뜨려서 도구의 날을 만드는 구석기시대와 날을 숫돌을 사용하여 갈아서 만드는 신석기시대로 나누어질 수 있다. 우리 칠곡 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이나 유물은 알려진 바가 없어서 다른 지역과의 비교가 불가능하다. 다만 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으로는 낙동강 서안 북삼읍 오평리 2개 지점과 낙동강 동안인 석적읍 중리 2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우선 낙동강 동안에 위치한 중리 유적 일대는 제4기 퇴적층이 발달해 있었던 곳인데, 공사 중에 응회암질 르발루아첨기, 석영질 쵸퍼, 석영질 망치돌 2점이 수습·신고되어 구석기시대 중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낙동강 서안의 오평리에서는 지표 조사에 의하여 박편석기들이 채집되었다. 이들 석기류는 돌을 깨뜨려서 날을 만든 전형적 타제석기들로 이를 근거로 본다면 우리 칠곡에서는 이러한 도구를 사용한 사람들이 구석기시대 중기부터는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칠곡지역의 신석기시대]
구석기시대의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신석기시대는 용기로서의 토기와 날 일부를 연마하여 도구를 만든 반마제 석기를 가용하면서 움집에서 생활하는 일반적 현상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칠곡 지역에서는 아직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서 어느 지점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를 추측하기는 어렵다. 앞 시대인 구석기시대에 이미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예견되고 있기 때문에 정밀한 학술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여 삶을 향유하였던 사람들의 모습을 알려 주는 유적들은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현재로서는 어떠한 모습도 그려낼 수가 없다.
[칠곡지역의 청동기시대]
이러한 시기적 공백을 깨고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하는 청동기시대가 되면 시기의 공백은 매우 길지만 구석기시대 유적이 점으로 표현되는 데에 비하여 이 시기에는 유적이 지역적으로 매우 넓혀진 분포 현상을 보이고 있다. 가령 왜관읍 석전리, 북삼읍 율리·어로리, 지천면 신리·황학리, 동명면 금암리·기성리·봉암리, 석적읍 남율리, 약목면 복성리·남계리 등에서 고인돌과 돌널무덤[石棺墓]로 대표되는 청동기시대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점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다른 지역의 청동기시대 지석묘 발굴 결과를 보면 지석묘 주변에는 주거지들도 함께 분포하고 있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이런 현상을 칠곡 지역에도 투영하여 고려하면 무덤의 주변에서 집터가 발견될 수도 있어서 본격적으로 칠곡 지역에 사람이 정착하여 삶을 영위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겠다.
집터에 대한 조사가 없는 대신 무덤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져 있어서 약목면 복성리 지석묘에서 처음으로 돌판을 이용하여 석관으로 매장시설을 만들고 그 위에 상석을 덮은 고인돌(支石墓)을 무덤양식으로 채택하고 있었음을 알려 주며 출토된 유물은 이제 돌칼, 화살촉, 대롱옥 등 유물이 완전히 갈려서 만들어진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완전한 마제석기시대로 들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비연속적인 칠곡 지역의 선사시대]
선사시대 칠곡 지역의 유적 분포를 보면 구석기시대 초기, 신석기시대, 철기시대에 해당되는 사료가 전혀 확인되지 않아서 칠곡에서 사람의 정착과 사회 발달이라는 부분을 추론하기에는 여전히 많은 자료의 누적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북삼읍 오평리와 석적읍 중리에서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유물이 발견되긴 하였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인 유구(遺構)를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칠곡에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발굴로서 확인시켜 준 것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지석묘라는 무덤발굴을 통한 것이 유일하다. 아울러 지석묘를 축조한 사람들이 그 후 어떠한 문화적 충격을 받으면서 복성리 고분으로 대표되는 삼국시대로 연속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선사사대에서 징검다리처럼 남아 있는 유적이나 유구의 분포로서 한 지역 사람들의 삶을 연속적으로 묘사하기에는 더 많은 매장 문화재의 자료 누적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