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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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宇坤 |
영어공식명칭 | Gim Ug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혜금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우곤(金宇坤)[1885~1919]은 1885년 3월 18일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아들 김석규(金錫奎), 손자 김영락(金永洛), 증손자 김동화(金東華)가 있다. 김우곤은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동지들과 국권 회복을 모색하였다. 1919년 3월 고종의 장례식에 다녀온 조한휘(趙漢輝), 한종순(韓鍾淳) 등에게서 서울의 독립 선언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직후 군북의 조동규(趙銅奎), 조상규(趙相奎), 김삼도(金三道), 박상엽(朴尙燁), 노수정(盧秀貞) 등과 3월 20일 군북 장날을 이용해 만세 운동을 결의하였다. 김우곤은 군북면의 여항산원효암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고, 군중을 동원하는 데 앞장섰다.
김우곤은 1919년 3월 20일 오전에 신창 야학교에서 있었던 독립 선언식에 참석하고 군북 장터로 향하였다. 오후 1시경에는 3,0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가 배포되었다. 독립 선언문이 낭독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행진할 때 김우곤은 군중을 지휘 선동하였다. 오후 5시경에 우체국과 경찰관 주재소 앞에 도달할 무렵 시위 군중은 5,000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 군경이 위협 사격을 하자 김우곤, 조용규(趙龍奎) 등은 앞장서서 다시 군중을 이끌고 대한 독립 만세를 제창하며 함께 전진하였다. 일본 군경이 조준 사격으로 주동자를 사살하자 군중은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다. 시위 군중 가운데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김우곤도 향년 34세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