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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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銅奎 |
영어공식명칭 | Jo Donggyu |
이칭/별칭 | 명칠(明七),이봉(夷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동촌1길 13-45[동촌리 595]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신은제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조동규(趙銅奎)[1885~1959]는 자는 명칠(明七)이고, 호는 이봉(夷峯)이다. 조동규의 아들은 조용호(趙鏞昊)가 있고, 손자로는 조양제(趙良濟)와 조국제(趙國濟) 등이 있다.
[활동 사항]
조동규는 1885년 6월 2일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였고 일제의 조선 강점을 한으로 여겼다. 함안군 대산면안지호(安知鎬), 여항면조계승(曺啓承), 의령안희제 등과 교유하였다. 1919년 3월 조동규는 서울의 만세 소식을 듣고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의 조용대(趙鏞大) 사랑채에서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 등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을 결의하였다. 그들은 3월 20일 군북 장날을 거사일로 잡아 역할을 분담해 의거를 준비하였다. 조동규는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 선언서를 알기 쉽게 바꾸고 축소하여 전단에 맞게 등사하는 일을 맡았다.
3월 20일 오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의 신창 야학교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오후 1시경에 3,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오후 5시경에는 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 군중은 함안군군북면 경찰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현지 경찰과 마산에서 출동한 일본 포병대와 충돌하였다. 마침내 일본 군경이 시위대에 발포하자 20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당하였으며, 주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조동규도 이때 체포되어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수형 번호는 1541호이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