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57
한자 趙鏞大
영어공식명칭 Jo Yongda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혜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 4월 7일연표보기 - 조용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용대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연표보기 - 조용대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조용대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 - 조용대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용대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조용대(趙鏞大)[1880~1919]는 고조할아버지는 조여필(趙汝弼)이고, 아버지는 조혁규(趙赫奎)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로 조만제(趙晩濟)·조한제(趙漢濟)·조봉제(趙鳳濟)가 있고, 9명의 손자가 있다.

[활동 사항]

조용대는 1880년 4월 7일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고종 장례식에 다녀온 동지들에게서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조상규(趙相奎), 김우곤(金宇坤) 등과 함께 3월 20일 군북 장날에 의거하기로 결의하였다. 조용대는 태극기와 독립 선언 전단지를 만들고, 군북면·대산면·산인면·가야면·법수면 일대의 동지들에게 군중 동원을 의뢰하였다.

시위 당일 오전 9시에 신창 야학교에서 있었던 독립 선언식에 참석하고 군북 장터에서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 선언 전단을 배부하였다. 오후 1시경 조상규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3,000여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여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였다. 진해 경중 포병 대대의 군인이 경찰과 합세하여 먹물을 뿌려 시위 군중을 검거하려 하였다. 조용대를 비롯한 시위 군중이 이에 저항하며 주재소에 돌을 던지자 일본 군경은 20여 발의 공포를 발사하였고, 급기야 시위 주동자에게 조준 사격하였다. 조용대은 이때 심장에 총알을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그의 처남 박주범(朴注範)도 주재소로 돌진하다가 순의하였다. 조용대의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남편의 시신을 동네로 옮긴 후 밤이 되자 몰래 공동묘지에 장사 지냈다.

[묘소]

조용대의 묘소는 공동묘지에 방치되어 있다가, 1982년 애국 지사 묘역 정화 사업으로 이루어지면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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