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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에서 일어난 불법 어복 채취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무신. 1787년(정조 11) 원춘도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장계(狀啓)하기를, “울산(蔚山)에 사는 해척(海尺) 등 14명이 몰래 울릉도에 들어가 어복(魚鰒)·향죽(香竹)을 채취하였는데, 삼척(三陟)의 포구에서 잡혔다. 그 섬은 방금(防禁)이 지극히 엄한데도 울산 백성이 번번이 병영(兵營)의 채복공문(採鰒公文)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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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고종 20) 7월 강원감영에서 편찬한 울릉도에 새로 이주한 호구 조사보고서. 울릉도에 새로 입주한 사람과 그 가족에 대한 인적 사항을 각 거주지별로 기록한 문서이다. 신입자(新入者)의 성명, 나이, 본관과 그 가족의 인적 사항이 약기(略記)되어 있고 신입자의 전 거주지와 이주 후에 할당된 개간지의 두락수(斗落數)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기재된 민호의 총수는 16호,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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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삼척영장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능성(綾城). 도원수파(都元帥派)의 파조(派祖) 구성노(具成老)의 12대손이다. 10대조 구치관(具致寬)은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좌리공신(左翼佐理功臣)에 올랐으며, 8대조 구장손(具長孫)은 종친부 전부(典簿)를 역임하였다. 이후 구억의 가문은 음서를 통하여 문반의 대열에 있었지만, 구억의 할아버지부터 무과로 진출하여 무반 가문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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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안용복의 2차 도일 당시 동행한 어부. 『숙종실록』 권30 1696년(숙종 22) 8월 29일 임자(壬子)조에 김성길(金成吉)은 전라도 낙안(樂安)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1696년(숙종 22)에 김성길은 안용복과 함께 울릉도에 출어하였으며, 안용복의 2차 도일에 동행한 인물이다. 안용복이 일본 어선을 발견하여 일본 마쓰시마[松島]까지 추격하여 침범 사실을 문책하고,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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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조선 후기 문신으로서 정치·경제·행정·군정·인재 등용 등 국정 전반에 걸쳐 경륜을 펼쳤으며, 문장에서도 뛰어나 책문·반교문·묘지명 등을 많이 썼다. 또한 국내외 기행문과 우리 역사에 대한 고증도 많이 남겼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 개국공신 남재(南在)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령 남일성(南一星)이다. 남구만은 송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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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고종 5) 일본의 태정관에서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결정한 문서. 1868년 일본 메이지 정권이 수립된 이후, 1869년(고종 6) 일본 메이지 정부 총리대신과 외무대신은 외무성 고관들을 조선에 보내 정세를 몰래 살펴보도록 했는데, 그때 조사 항목 중에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로 되어 있는 전말’을 조사해 오도록 지시하였다. 그 지시 사항과 조사 복명서(復命書)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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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안용복이 2차로 일본에 들어갈 때 함께 간 승려. 뇌헌은 순천(順天)의 승려로, 1696년(숙종 22) 동래(東萊) 사람 안용복(安龍福), 흥해(興海) 사람 유일부(劉日夫), 영해(寧海) 사람 유봉석(劉奉石), 평산포(平山浦) 사람 이인성(李仁成), 낙안(樂安) 사람 김성길(金成吉), 연안(延安) 사람 김순립(金順立)과 순천의 승려 승담(勝淡)·연습(連習)·영률(靈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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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대마도사정관으로 활동한 일본인. 1693년(숙종 19) 안용복 등의 40여 명의 어부가 울릉도 해역에서 돗토리현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졌고, 안용복 등은 일본의 오오야가[大谷家] 어부들에 의해 오키시마[隱岐島]로 납치되어 갔다. 이때 안용복은 그곳에서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들어 구금 납치의 부당성을 도주(島主)에게 따졌다. 안용복의 항의를 받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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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안용복이 2차로 일본에 들어갈 때 함께 간 승려. 단책은 순천(順天)의 승려로, 1696년(숙종 22) 동래(東萊) 사람 안용복(安龍福), 흥해(興海) 사람 유일부(劉日夫), 영해(寧海) 사람 유봉석(劉奉石), 평산포(平山浦) 사람 이인성(李仁成), 낙안(樂安) 사람 김성길(金成吉), 연안(延安) 사람 김순립(金順立)과 순천의 승려 뇌헌(雷憲)·승담(勝淡)·연습(連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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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일본 선박 만리환이 울릉도의 규목(槻木)[느티나무]을 반출한 사건. 1883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로서 울릉도 개척의 선봉장이었던 김옥균은 1883년 6월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서 국채를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와 민비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가 김옥균이 휴대한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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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천수환 사건 시 독판교섭통상공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원경(遠卿), 호는 천식(泉食). 민달용(閔達鏞)의 아들로 민태용(閔泰鏞)에게 입양되었다. 1871년(고종 8)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81년(고종 18) 이조판서로 승진하였으며 곧이어 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과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서장관(書狀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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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독판교섭통상사무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현경(玄卿), 호는 한산(翰山). 민승세(閔承世)의 아들로 민명세(閔命世)에게 입양되었다. 1874년(고종 1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사은정사(謝恩正使) 한돈원(韓敦源)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다. 1876년(고종 13) 사신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나서 홍문관부수찬·사간원지평·사복시정(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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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삼척부사를 역임한 무신. 본관은 달성(達城). 아버지는 지평(持平) 서명휴(徐命休)이다. 서노수는 1766년(영조 42)에서 1769년(영조 45)까지 삼척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769년(영조 45) 11월 29일에 울릉도의 관리를 소홀히 하였다는 영의정 홍봉한의 탄핵으로 체직(遞職)되었다. 삼척부사로 재직 시 향서당(鄕序堂)을 중건하여 좌수 1명, 별감 3명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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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한 문신. 18세기 중엽부터 울릉도 인삼이 잠상(潛商)과 관원들에 의하여 밀채(密採)되어 유통되었다. 이에 1769년(영조 45) 11월에 삼척영장 서노수가 처벌되었고, 동년 12월 강원감사 홍명한(洪名漢)은 탄핵을 당하였다.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계중(繼仲), 호는 귀천(歸泉)과 동원(桐源). 남원부사 서정리(徐貞履)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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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에 진을 설치할 것을 상소한 무신. 1694년(숙종 20) 7월 16일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 성초형이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군비책 6가지를 상소하여 건의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에 충청도 병사(兵使) 및 영장(營將)을 두고, 울릉도에 진(鎭)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동선령(洞仙嶺)과 청석동(靑石洞)에 진을 설치하고, 셋째는 평산(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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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에 거주를 금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주기적으로 순찰하도록 한 정책.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안용복(安龍福) 등 동래와 울산 어부 40명이 울릉도에 출어한 일본 어부와 충돌하였다. 그 과정에서 안용복 등은 일본 어부들에 의해 오키시마[隱岐島]으로 납치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안용복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들어가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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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땅이라고 주장한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여암(旅庵), 자는 순민(舜民). 아버지는 신숙주(申叔舟)의 아우인 신말주(申末舟)의 10대손 진사 신내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한의홍(韓儀鴻)의 딸이다. 33세 때까지 여러 곳으로 옮겨 살다가 33~43세까지 고향에 묻혀 살면서 저술에 힘썼다. 신경준이 관직에 나아간 것은 43세 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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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의 불법 어복 채취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무신. 1787년(정조 11) 원춘도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울산(蔚山)에 사는 해척(海尺) 등 14명이 몰래 울릉도(鬱陵島)에 들어가 어복(魚鰒)·향죽(香竹)을 채취하였는데, 삼척(三陟)의 포구에서 잡혔다. 그 섬은 방금(防禁)이 지극히 엄한데도 울산 백성이 번번이 병영(兵營)의 채복공문(採鰒公文)을 가지고 해마다 방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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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의 어려운 실정을 조정에 보고한 문신. 본관은 청송. 자는 치화(穉華). 아버지는 진사 심의린(沈宜隣)이다. 1862년 예방승지(禮房承旨), 1874년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878년 예조·형조·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881년 정부의 기구 개편에 따라 통리기무아문사(統理機務衙門事)·기계군물함선당상(機械軍物艦船堂上)이 되어 청나라에 신무기 제조 및 군사 훈련을 의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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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어부이자 민간외교가. 안용복은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하면서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 말을 잘하였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이곳을 침입한 일본 어민을 힐책하다가 일본으로 잡혀갔다. 일본에서 울릉도가 조선의 땅임을 강력히 주장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契)를 받아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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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년 중국에서 제작된 세계 지도로 독도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 「왕반지여지도」는 1994년 중국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만든 지도 서적인 『중국고대지도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는 1594년에 처음 제작된 이후 1603~1626년 사이에 증본되었으며, 이번 자료는 증본된 것으로 추정된다. 독도를 가리키는 우산도의 ‘우(于)’를 ‘정(丁)’으로 잘못 읽어 ‘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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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이영옥이 울릉의 역사·지리 등에 관해 쓴 문헌. 서문이나 발문 등이 일체 없어 간행 관계는 미상이며 목차도 없는데다 권별로 분류되어 있지도 않다. 또 내용별로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지도 않다. 저자에 관해서도 부록이 수록되어 있지 않아 상세히는 알 수 없다. 제1책과 제2책 맨 앞에 ‘왕고실암선생부군유고(王考實庵先生府君遺稿)’라고 한 다음 ‘실암이영옥자형저(實庵李英玉子衡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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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각석문. 1937년 울릉도 도동 죽항 공사장에서 각석문 2기가 발견되었으나, 현재는 독도박물관 옆 향토 사료관에 신묘명 각석문 1기만이 전시, 보관되어 있다. 1711년(숙종 37) 5월에 삼척영장(三陟榮將) 박석창(朴錫昌) 일행이 울릉도 수토(搜討)의 행적을 남기기 위해 새긴 것이다. 마름모꼴의 바위 면에 20행, 총 143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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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에 있었던 조선 후기 울릉도 수토 기념비. 수토관인 삼척영장(三陟營將) 구억(具億)이 울릉도를 수토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함께 간 인물들의 성명을 바위 면에 새겼다. 현재 실물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지만, 이홍식 교수에 의해 탁본이 전해진다. 탁본에 의하면, 주형 광배석에 34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옹정십삼년을묘윤사월초팔일수토관삼척영장구억군관최린박원창왜학김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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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안용복이 1696년 2차로 일본에 들어갈 때 함께 갔던 인물. 유봉석은 영해(寧海) 사람으로, 1696년(숙종 22) 동래(東萊) 사람 안용복(安龍福), 흥해(興海) 사람 유일부(劉日夫), 평산포(平山浦) 사람 이인성(李仁成), 낙안(樂安) 사람 김성길(金成吉), 연안(延安) 사람 김순립(金順立)과 순천(順天)의 승려 뇌헌(雷憲)·승담(勝淡)·연습(連習)·영률(靈律)·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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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안용복이 1696년 2차로 일본에 들어갈 때 함께 갔던 인물. 유일부는 흥해(興海) 사람으로, 1696년(숙종 22) 동래(東萊) 사람 안용복(安龍福), 영해(寧海) 사람 유봉석(劉奉石), 평산포(平山浦) 사람 이인성(李仁成), 낙안(樂安) 사람 김성길(金成吉), 연안(延安) 사람 김순립(金順立)과 순천(順天)의 승려 뇌헌(雷憲)·승담(勝淡)·연습(連習)·영률(靈律)·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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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의 산삼 채취시기를 앞당길 것을 건의한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백상(伯常), 호는 방한(方閒). 예조판서 윤세기(尹世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식(尹湜)이고, 아버지는 윤득민(尹得民), 어머니는 조정빈(趙鼎彬)의 딸이다. 1756년 지평(持平) 때 당론(黨論)을 논한 것으로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 풀려난 뒤 제주목사로 나갔으며, 1768년 대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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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 등지에서 백성들이 농사짓게 할 것을 상소한 무신. 자는 탕경(湯卿). 아버지는 윤성임(尹聖任)이며, 처는 이이성(李以省)이다. 1734년(영조 10)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 윤필은은 섬이나 육지로 피해 옮겨 다니는 무리들을 조사하여 수괄(搜括)해서 베[布]를 징수해야 된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신구(新舊)의 제언(堤堰) 가운데 저수(儲水)에 마땅하지 않은 것은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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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현종 8)에 사이토 호센이 간행한 독도에 관한 일본 최초의 문헌. 1667년 일본 운주(雲州) 지방 번사(藩士)였던 사이토 호센[齋藤豊仙]이 편찬한 것으로, 일본의 은주(隱州)[온슈]를 관찰하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일본인에 의해 기록된 최초의 기록으로 당시 바다를 표류하던 중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담겨져 있다. 일본어로 된 필사본으로 5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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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삼척영장을 역임한 무신.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항에는 물양장 시설 건설로 제거되었다는 이경정과 정재천의 각석문이 있다. 태하항 입구 우측 암벽에 있었다고 하는 이 각석문은 ‘영장정재천지인정화길안응진배리김영우도광신묘영장이경정배행설영호이한욱전광주(營將鄭在天知印鄭和吉安應辰陪吏金永祐道光辛卯營將李慶鼎配行薛永浩李漢郁田光周)’라 쓰여 있었으며, 이 각석문을 통해서는 영장 정재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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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왜선으로부터 울릉도를 지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연(演). 자는 휘고(輝古), 호는 은암(隱巖). 대사헌 이언충(李彦忠)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이세미(李世美)이다. 1650년(효종 1) 생원·진사가 되었으며 1656년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4년(현종 5) 주서를 거쳐 전적·지평·정언·지제교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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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에 변장을 두고 경작하기를 상소한 유생. 1726년(영조 10) 강원도 유생 이승수는 영동(嶺東)의 아홉 군(郡)에 수영(水營)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계책을 세우고, 울릉도(鬱陵島)에 변장(邊將) 1원(員)을 두고서 민간을 모집하여 경작하도록 조정에 상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그전에 곤수(閫帥:병사나 수사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가 없던 데에 새로 두기는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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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안용복이 1696년 2차로 일본에 들어갈 때 함께 들어갔던 인물. 이인성은 평산포(平山浦) 사람으로, 1696년(숙종 22) 동래(東萊) 사람 안용복(安龍福), 흥해(興海) 사람 유일부(劉日夫), 영해(寧海) 사람 유봉석(劉奉石), 낙안(樂安) 사람 김성길(金成吉), 연안(延安) 사람 김순립(金順立)과 순천(順天)의 승려 뇌헌(雷憲)·승담(勝淡)·연습(連習)·영률(靈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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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 순찰을 회피한 죄로 문책을 당한 관리. 1695년(숙종 21) 4월 13일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조정에 자산군수(慈山郡守) 이준명이 전년(前年)에 삼척첨사(三陟僉使)가 되었을 때 울릉도(鬱陵島)를 순찰하는 일을 싫어하여 회피하였음을 아뢰었다. 더불어 이준명을 파출(罷黜)시키고 이후에 다시 벼슬을 제수하지 말고 회피한 죄를 징계할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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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과 1696년에 오카지마가 저술한 안용복의 도일에 대한 일본 측 자료. 매해마다 기술된 『인부연표』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까지 찾아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안용복을 ‘안핀샤’로 불렀으며, 얼굴이 검고 고향은 ‘동래부 부산 좌천1리’라 하며 상세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1693년(숙종 19) 6월 4일의 기록에는 안용복이 일본에 온 이유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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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순조 1) 야다 다카마사가 저술한 안용복의 이야기가 실린 일본 문헌. 울릉도를 오가며 어업 행위를 하는 어부들의 이야기와 안용복(安龍福)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다. ○ 독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오키도오고로부터 송도는 서쪽으로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2박 2일 가야 되며, 도법 36정 1리[약 3.3㎞]로서 해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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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삼척영장을 역임한 무신. 정재천의 울릉도 수토 기록은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항 물양장 시설 건설로 제거되었다는 이경정과 정재천의 각석문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으며, 『관동읍지(關東邑誌)』에 정재천이 삼척영장으로 근무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정재천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1846년(헌종 12) 7월부터 1847년(헌종 13) 6월까지 삼척영장으로 근무하였으며, 삼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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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의회는 1905년 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시마네현 오키군[隱岐郡] 오키노시마[隱岐の島]에 편입한 지 백 주년이 되는 2005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정하는 조례안 제정을 강행하여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그후 “독도를 돌려 달라”는 내용의 텔레비전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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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년 일본의 지리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제작한 한반도 지도.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는 누나가 센다이번[仙台藩] 영주의 측실로 들어간 것이 인연이 되어 형과 함께 센다이번에서 일하였다. 센다이번에서 교육과 경제정책에 관해 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그만두고 전국을 걸어서 여행하였다. 러시아의 위협에 대해 알리며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해국병담(海國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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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울릉도 수토를 정지해 줄 것을 조정에 요청한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계량(季良). 승지 조희보(趙希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조형(趙珩)이고 아버지는 조상개(趙相槪), 어머니는 오상한(吳詳漢)의 딸이다. 경종이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한 뒤 응교(應敎)·사간(司諫)·교리(校理)를 지내면서 불합리한 조정 대신을 탄핵하기도 하였다. 1727년(영조 3)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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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대마도도주를 역임한 일본인. 대마도도주인 형 종의륜(宗義倫)이 죽자, 동생 종의진(宗義眞)이 대마도주가 되었으며, 종의진의 아들 종의방(宗義方)은 대를 이어 대마도도주가 되었다. 역대 대마도도주들은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를 담당하였는데, 종의진의 전대(前代) 도주인 종의륜은 죽도(竹島)[울릉도]의 영유권을 두고 조선에 강경한 외교정책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에도의 도쿠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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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일본 역사가 오카지마 마사요시가 저술한 안용복의 이야기가 실린 일본 문헌. 『죽도고』의 「오오야가(家) 선인(船人)에 의한 조선인 연행」이란 항목에는 안용복과 그의 일행이 일본인에게 잡혀 일본으로 가서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은 부산 좌자천일리(佐自川一里) 14통 3호[현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 주소를 둔 외거노비(外居奴婢)였고 일본 선원들에게 나이를 4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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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년부터 1763년에 기타조노 미치안이 저술한 독도 기록이 있는 일본 문헌. 독도가 일본령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일본 문헌 중 하나로서 이후 쓰여진 『죽도잡지』가 인용한 문헌이다. 기타조노 미치안[北園通葊]이 오키시마[隱岐島] 어부들의 구술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당시 울릉도와 송도를 오가며 어업 행위를 하던 어부들의 이야기를 모은 것으로 저자가 직접 울릉도와 독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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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오오야·무라카와 두 가문에게 발급한 울릉도 조업 허가서. 임진왜란 직후 요나고항을 거점으로 동해 연안의 교역을 행하고 있던 오오야 진키치[大谷甚吉]는 대풍으로 조난을 당해 울릉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는 천혜의 보고인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고자 하였다. 울릉도는 조선의 영토이므로 울릉도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부의 허가가 필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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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 오오야 가문에서 발행한 안용복을 납치하여 에도 막부로 보낸 내용을 적은 문헌.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에는 “당인(唐人)[조선인]을 에도 막부에 인도하고, 에도 막부는 즉시 심문하였다. 조사가 끝나 순차적으로 무엇인가를 내려 주고 귀국시켰다(唐人江府江御引渡 則江戶表御穿鑿 相濟順 御贈歸)”는 기록이 있다. 이외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내용이 광해군과 효종 시절의 일이 3번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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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독일의 클라프로트가 제작한 것으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이 문자로 명시된 지도. 독일학자 클라프로트(J. Klaproth)[1783~1835]는 베를린 태생의 역사학자 및 언어학자로, 대부분의 서구 언어뿐만 아니라 중국어와 일본어까지 능통한 당대 제일의 동양학 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베를린,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양학 관계 자료의 정리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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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있는 조선 후기 각석문. 자연 암반 면에 별다른 표면 정리 없이 글자를 새겼는데, 1804~1805년까지 삼척영장을 지낸 이보국(李輔國)의 각석문과 1801년 삼척영장을 지낸 김최환(金㝡煥)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영장(營將), 군관, 왜학(倭學), 사령(使令) 등의 당시 관직명이 여러 번 확인되었고, 강릉(江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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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월송만호를 역임한 무신. 1791년(정조 15)에 수문장(守門將)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강원도 월송만호로 부임하였다. 월송만호 시절, 2년에 한 번 울릉도를 수토한다는 규정에 따라서 1794년(정조 18) 4월에 강원도 관찰사 심진현(沈晉賢)의 명으로 울릉도를 수토하였다. 이후 울릉도의 도형(圖形)을 작성하여 토산물과 함께 비변사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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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강원감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군평(君平). 참판 홍만종(洪萬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홍중하(洪重夏)이다. 아버지는 대사헌 홍경보(洪景輔)이며 어머니는 심계량(沈季良)의 딸이다. 문음(門蔭)으로 입사(入仕)하여 금부도사로 재직 중 1754년(영조 3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수찬에 특제(特除)되었다. 그 뒤 정언·수찬·교리 등을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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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이조판서 홍만용(洪萬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중기(洪重箕)이다. 아버지는 홍현보(洪鉉輔)이며 어머니는 임방의 딸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다. 1735년(영조 11) 생원이 되고, 음보(蔭補)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이 세자빈[惠慶宮洪氏]으로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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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삼척영장을 역임한 무신. 홍우보는 1755년(영조 31) 참군(參軍)을 거쳐, 1759년(영조 35)에 훈련주부(訓鍊主簿), 1760년(영조 36)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1761년(영조 37)에 충청병우후(忠淸兵虞侯), 1763년(영조 39)에 무겸(武兼), 1764년(영조 40)에 훈련부정(訓鍊副正), 1765년(영조 41)에 진주영장(晉州營將), 1767년(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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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평해 지역에서 활동한 무관. 1705년(숙종 31)에 울릉도를 수토하고 돌아올 때에 평해 등 고을의 군관 황인건을 포함하여 16명이 익사하였으므로, 숙종이 휼전(恤典)[조정에서 각종 재난에 처한 백성들에게 내리던 일종의 긴급 구제금]을 거행하라고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