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D02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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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죽변4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동 |
피난민 70여명 중 60여명은 바다에서 활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음 죽변에 왔을 때 어선의 규모와 함께 수산업의 규모를 보고 혀를 찼다고 한다. 특히 선주의 경우 ‘이곳의 수산업은 수산업이 아니지’라는 말을 뱉을 정도로 특히 어선의 규모와 함께 명태의 어획량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피난민들이 죽변으로 오기 전 거주한 함경도는 명태잡이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홍원군 삼호면은 명태의 최대 산지 중 하나인데, 그들이 떠나기 전까지 이 명태를 잡아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집사고 땅을 샀던 사람들이었다. 명태잡이 어선은 가이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범선으로 그 크기는 동력선의 20톤에 해당된다. 돛대 길이는 12~13발 정도이며, 정박시에는 눕혀 둔다. 여기서 가이선은 깊은 바다에 대 놓은 범선까지 사람 또는 화물을 싣고 나를 때 사용하는 수송선이었다.
‘동지 밑에 많이 난다’고 하는 명태는 10월에 시작되는데, 선주는 봄부터 선원을 구하러 다닌다. 좋은 선원을 구하지 못하면 남쪽을 향해 강원도까지 찾아가기도 하는데, 한 배에 14명씩 승선하는 범선에서 선원의 역할을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 해 생산량과도 연결된다. 10월부터 시작된 명태잡이는 이듬해 1월까지 지속되며, 선주는 그 동안 잠을 잘 틈이 없다. 설치한 그물을 걷고 어항에 내리고 이를 반복하는데, 어항에 내려서는 매 새벽마다 덕장에 말린 명태를 훔쳐가는 아이들에게서 명태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큰 범선으로 명태를 잡던 이들은 한국전쟁과 동시에 남으로 피난왔으며 이제 그들의 수산 기술로 죽변에서 오징어잡이를 시작하였다. 바다에서 배를 가지고 행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명태와 오징어는 큰 차이는 없지만 규모에서나 사용하는 어로도구에서 둘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특히 오징어는 명태만큼 규모가 클 필요가 없으며, 트롤을 사용하여 잡는 것에서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함경도 아바이들에게 오징어잡이는 수산업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죽변에는 명태가 없었을까. 1960년대 죽변에서도 명태는 많이 났다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함경도 아바이들에게 많이 난다라는 기준이 달랐기 때문에 명태잡이를 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길 ‘죽변은 수심 50발이 넘은 깊은 바다이기 때문에 명태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행하며 따라서 ‘그물로 명태를 잡는데 한계가 있고 힘들다’라고 하였다. 함경도 아바이들은 죽변에서 더 이상 명태를 잡지 않았고 꽁치와 오징어만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