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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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壽井區高登洞地域-誌-史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
등자리는 인능산 밑인데, 덕수이씨 후손의 등과하는 경사가 잇따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덕수이씨의 묘가 많은데 벼슬이 높아 석등이 세워진 마을이란 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덕수이씨는 고등동 일대에 세거하였는데 이추(李抽)의 아들 풍성군 이의번(李宜蕃)의 묘를 쓰고 그 후손들이 세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등자리는 특히 풍성군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계파를 형성했는데 의정공파 이경민의 후손과 해풍군파 이함의 후손, 그리고 북계공파 이목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찬은 16대에 걸쳐 거주하는 것으로 약 500년을 여기서 생활하였으며 후손이 번성하고 관직에 나아가 명문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따라서 등자리마을의 덕수이씨들은 자신의 조상에 대한 자긍심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덕수이씨의 문중 재산이 많은 관계로 문중에서 심각한 갈등이 야기되었다. 특히 해방 후 개인의 토지로 인정하는 것이 600평으로 제한되면서 문중의 친족들간에 갈등이 심각해져 재판소송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문중의 산에 대한 분쟁으로 이어져 13명의 명의로 등기했지만 이것이 분쟁을 야기해 문제가 되었다.
농업에 의존하여 공동체를 영위하고 운영하는 방식은 해방 후 농지법이나 심리법에 의해 해체된 것이 특징이다. 문중의 공동재산이 축적되어 덕수이씨의 공동재산을 관리해야만 공동자금을 통해 전체 마을의 애경사를 치를 수 있다. 그러나 문중의 재산 다툼으로 인해 공동의 재산이 와해되면서 공동체의식이 결정적으로 약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