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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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盆唐區雲中洞地域-誌-個人史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
[이용환]
이용환옹은 본관은 용인이고, 조사시점 현재의 연령은 80세이다. 고연령임에도 불구하고 기억력이 좋고, 성격이 적극적이기 때문에 인터뷰의 개략적인 설명을 듣고 곧바로 녹화에 참여해 주셨다. 다만 청년시절에 앓았던 축농증으로 인해 발음을 알아듣기가 약간 어려웠다. 조사자가 이해하지 못한 발음을 수차례 되물은 까닭이 이 때문이다.
이용환옹은 판교보통학교 11회 졸업생이다. 국민학교 동창으로 이광수, 윤병덕, 유원수, 고수만 등의 이름을 기억하나 모두 작고하였다고 한다. 하선생이라는 조선인 교사에게 배운 기억이 있다. 월사금 40전을 내지 못해 몇 번이나 학교에서 집으로 쫓겨온 적이 있었을만큼 그의 집은 오로지 농사만을 짓던 가난한 집이었다.
17~18세 때에는 측량조수로, 그 후에는 영등포에 있던 아사히삐루(맥주) 공장에 약 3개월간 다녔고, 그후에는 용산에 있던 일본인 점포의 점원으로 일했다. 이후에는계속 농사를 생업으로 삼았다.
결혼은 20세(부인은 17세)에 전통식으로 했다. 부인은 정신대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일찍 혼인을 한 것이다.
일본인 점원으로 일하고 난 뒤에는 징용에 걸렸으나 다른 사람 대신 가게 되었다는 말에 분개하여 면직원에게 따지고는 설사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대신 강봉수라는 인척이 가게 되었다. 징용을 가지 않는 대신에 연성소라는 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지역에는 6.25 전에 서북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이 있었는데, 정보제공자는 대한청년단장을 3년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서울과 광주 등지의 초등학교와 교육청을 대상으로 교육용 글라이더 판매사업을 하였다.
28세 때 늦게 군대에 갔지만 대구에서 근무를 하다가 16개월만에 축농증으로 제대를 하였다. 1973년도까지 운중동 이장을 지내면서 마을회관의 건립 등을 성사시키고, 마을의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특히 국가와 경기도의 지원을 받고 은행 대출까지 받아 지은 마을회관을 주민들에게 임대하여 모든 채무를 완전히 정리한 것은 이용환씨의 수완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22대조인 관찰사공이 청백리로 유명하였고, 이에 감명받아 이용환씨는 평생을 농사만 지으면서 청렴하게 살아왔다고 한다.
[정숙현]
이용환옹의 부인으로 함께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발음이 명확하고 성격이 이용환옹보다 더욱 직선적이었다. 친정은 성남시 중원구 성남초등학교 부근에 있다.
정신대를 피하기 위해 열일곱 살에 시집을 왔다.
“밥이나 하고 집안이나 치구 그랬죠. 빨래나 하구. 빨래두 작은어머니가 두 분이라 나이 어리고 손시렵다고 작은어머니들이 빨래하구, 착했어. 작은어머니들이 그렇게 자랐는데 정신대 간다구…….”
정숙현 여사의 구술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귀하게만 자라다가 별다른 준비 없이 친정 시외숙의 중매로 혼인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 친정에서는 사위감의 집이 가난하다고 반대를 하였지만, 결국 혼인을 하게 된 것이다. 시집 올 때에 이불 한 채, 옷 몇 벌, 어머니가 쓰시던 장롱을 살림살이로 가져왔다.
시집을 와서는 시집의 생활형편에 실망하여 친정을 돌아가고 싶었으나, 할머니가 늘 말씀 하시던 여자의 도리가 생각나서 집에는 돌아가지 못했다. 아이를 둘 낳을 때까지도 자살할 생각을 할 정도로 우울증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럭저럭 집안 살림과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젊은 시절의 슬픔을 극복하게 되자. 어느덧 몸에는 병이 생겨 지금은 이 병치레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