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1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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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盆唐區藪內洞地域-誌-住生活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
[이연복]
수내동은 중앙공원 내에 큰역말(30여 호), 넘어말(20여 호), 숲안(20여 호) 등의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고, 6·25 때 피난 온 이들이 중앙공원 쪽을 보고 명당이라는 말을 하였다. 6·25전쟁 이전에는 큰 기와집 한 채에 대부분 초가집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었는데 전쟁 때 거의 소실되었다.
1990년대 개발사업으로 마을의 한옥 한 채만 중앙공원 내에 남아 있고, 역말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고, 원주민들은 정자동에 아파트 70평을 분양받아 살고 있다. 주택 소유는 대부분 자가를 소유하였는데, 6·25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세를 내어 살게 되었고, 본인이 살던 집은 부친이 서울에 오면서 친척에게 세를 받지 않고 빌려주었다. 본인이 살았던 곳은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 13번지로, 집 구조는 안방, 건너방, 가운뎃방, 마루, 부엌으로 건평 20여평이었는데, 이사 후에는 새마을운동이 일어나 사랑방이 추가된 ㄱ자집으로 초가집은 슬레이트집으로 바뀌었다. 난방은 온돌로서 5·16 이전까지 중앙공원에서 나무나 낙엽을 긁어다가 연료를 사용하였다.
주택의 공간은 한 방을 가족 전체가 사용하면서 노인네가 계시면 건넌방, 남자 어른은 사랑방에 기거하지, 지금처럼 부부가 쓰는 안방이 따로 있고 건넌방은 아들이 쓰고, 어느 방은 딸이 쓰고 하는 일은 없었다. 마루는 오늘날 양옥의 거실로 사용하였다. 이 당시 텃밭이 마당 옆에 있었는데, 가을에 벼를 베어서 우마차에 실어다가 마당에서 탈곡해야 하니까 마당은 일년에 한 번씩 정리하여 좋은 흙으로 다졌다. 마당은 건평보다 넓었는데, 그때는 멍석을 만들어 벼를 말려야 하는데 그 멍석을 들고 다니던 게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속담에 화장실하고 처갓집하고는 떨어질수록 좋다고 하여 화장실은 떨어져 있었고, 대문과 창문은 남쪽으로 나 있었다.
주택은 개울 옆이나 마을의 수호신으로 위하는 나무 부근에 짓지 않았고, 장독대에는 짚으로 만든 터줏가리를 만들어 놓아 모셨고, 신주는 안방 벽장에 모셨다. 잠을 잘 때는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고, 이사 가는 날은 손이 없는 날을 택일하고, 못을 박는 것도 날짜를 정하였다.
[이상구]
주택은 전부터 양택(陽宅)을 잡아 지었고, 집을 지을 때 집터를 단단히하기 위해 동네 청년들이 모여 지경을 하였다. 집을 짓는 데 터를 닦을 적에 밤에 횃불을 켜놓고서 동네 장정들이 큰 돌을 가져다가 말뚝을 박아 거기에 줄을 연결해서 7, 8명씩 그것을 높이 들었다가 쾅 놓았다.
술을 먹고 선소리 하는 사람의 구령과 사설에 맞춰 지경을 하는 것은 기초를 닦는 것 외에 집을 짓고 잘 살라고 하는 뜻이 담겨 있다. 가을 추수 후에는 이엉을 엮어 초가를 올렸다.
옛날에는 모두 초가에서 살았는데, 안채와 바깥채, 행랑채가 있으며, 사랑방과 안채도 건넌방이라고 하고, 안방이라고 하며, 대청이 있고, 또 선조를 모시는 큰댁에는 가묘를 모시고 있었다. 가묘는 대청 마루에 깨끗한데다 이렇게 별실을 만들어 고조할아버지까지 위패를 모셨다.
현재 본인이 살고 있는 집은 다가구 주택으로 1991년에 서울대학교 임효재 교수가 살던 것을 구입한 것이다. 이 주택은 대지 50평, 3층에 건평 80여평에 주차장이 있으며, 도시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이 집의 대문은 본인이 입주한 뒤에 출입의 편리를 위해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