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1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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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盆唐區藪內洞地域-誌-個人史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
[이연복]
1938년생(67세)으로 한산이씨이다. 그의 집안은 500년간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수내리[현재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중앙공원 부근]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도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태어나 현 야탑동의 돌마초등학교에 다녔으며, 현재도 30~40명이 매년 한두 번 동창회를 연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 한백효 선생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이 분은 광복 후 중동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학창시절의 기억으로 남는 것은, 분당에 있는 양영고등보통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중학교 졸업자격이 없었으므로 고입 입학 자격 검정고시를 보아 합격하여 서울 사범학교(현재 교육대학 전신)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문교부장관의 고입 자격 합격증을 아직 보관하고 있는데, 합격증서를 보면 인쇄한 것이 아니라 붓으로 쓴 것이다.
어렸을 때 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남녀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남자는 언덕 위쪽, 여자는 유리하게 언덕 아래쪽에서 당겼다. 남자 어린애들은 모두 여자쪽에서 잡아당기게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줄을 잡아당기는데 할머니들이 남자 쪽에 와서, 가시나무로 막 후려쳐서 줄을 당길 수 없게 하여 여자쪽이 이기도록 한 것이다. 아마 이것은 여자쪽이 이겨야 이 마을에 풍년이 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상구]
1931년생(74세)으로 한산이씨이다. 그의 집안도 500년간 경기도광주군 돌마면 수내리[현재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중앙공원 부근]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5형제 중 셋째로 수내리 219번지에서 태어나 돌마심상소학교(후에 국민학교로 변경)를 다녔다. 이 당시는 일제 말기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참혹한 시절을 보내다가 6학년 되던 해에 8·15 광복을 맞았다.
태극기도 어려서 못 봤는데 광복이 되자 각 동네마다 태극기를 그려 가지고 외치며, 그렇게 환희했던 광경이 지금도 역력하게 떠오른다. 8·15광복 이듬해 2월에 국민학교를 졸업해야 되는데, 한글을 배우고 졸업하느라고 5월 달에야 졸업을 한 뒤 서울의 선린중학교에 입학하여 주경야독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5형제가 학비를 낼 수 없는 그런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한 그 쓰라린 과거는 참 지금도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분당신도시 건설이 시작될 무렵인 1988~89년에 수내동 중앙공원 내의 한산이씨 문화재를 보전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결실이 되어 발굴조사 끝에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6·25전쟁 으로 가정 생계가 막막하자, 본인이 학교에서 배웠던 영어를 바탕으로 수원비행장의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를 하다가 몇 달만 공부를 하면 5년제 중학교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수원에 있는 피난 중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후 양계업도 해보고, 중앙농협에서 오라고 해서 농협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3년 동안 돌마국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또 친척 되는 분이 양조장에 와 있으라고 하여 3년 동안 봉사하다가 수내동에 라디오가 한 대도 없었으므로 트랜지스터 라디오 하나로 수내동, 정자동, 서현동, 분당동, 이매동 5개 마을의 유선 방송사업을 시작하여 3년간 운영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뒤 처삼촌이 목장업을 하므로 소를 기르는 일을 돕다가 서울로 와서 학교 부근의 문방구를 하여 생계를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