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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892
한자 丁霖
이칭/별칭 경택(景澤),충민(忠敏)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권수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11년 - 정림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19년 - 양산 군수 정림 왜구 격파
몰년 시기/일시 1419년연표보기 - 정림 사망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압해(押海)
대표 관직 병조 판서

[정의]

조선 전기 화순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압해(押海). 자는 경택(景澤), 시호는 충민(忠敏). 대장군 정경(丁瓊)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정봉(丁鳳)이다.

[활동 사항]

정림(丁霖)[?~1419]은 1411년(태종 11)에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임실 현감, 양산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에 대마도의 왜구가 비인현(庇仁縣)을 침범하여 왕이 왜적을 무찌르는 전략을 의논할 때 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을 찬획사(贊劃使)로 삼고,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구절제사(九節制使)를 인솔하고 가서 토벌케 하였다. 영상(領相) 유정현(柳廷顯)이 도통사(都統使)가 되고, 참찬(參贊) 최윤덕(崔潤德)이 도절세사(都節制使)가 되어 200여 기병과 2만여 군사들을 데리고 대마도에 직향할 때 정림은 양산 군수로써 군오를 정비하고 도와서 삼전삼첩하고 승승장구하여 대마도의 두지포(豆池浦)에 이르렀다. 정림은 소수의 군사로 적진에 깊이 들어가서 여러 차례 전승을 올리다가 활과 화살이 다하자 전사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예관(禮官) 허성(許誠)을 보내어 초혼(招魂)하여 장례를 치렀다. 능주에 입거하였다. 정림의 5세손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최시망(崔時望)을 따라 전투에 참가한 정충훈(丁忠訓)이다.

[상훈과 추모]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증직하고 정려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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