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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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광철 |
발생|시작 장소 | 빨치산 활동 거점지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백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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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전쟁 |
관련 인물/단체 | 조선 노동당 전남 도당|전남 유격 사령부 |
[정의]
1950년~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6·25 전쟁은 1950년 7월 북한 인민군이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점령하고 이후 9월 말엽에 서울 수복으로 퇴로가 차단된 가운데 빠르게 퇴각한 것으로 일단락됐다. 화순 지역에서는 정규군 간의 치열한 전투는 없었고 인민군의 점령 기간도 2개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민군 점령 기간에 적지 않은 민간인이 반혁명 세력이라는 이유로 학살당했고 수복 후에도 인근 산간 지대에 머물며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민간인 피해는 발생하였다.
또한 군경이 1950년 9월부터 1955년까지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 피해가 속출됐다. 화순 지역은 전쟁 그 자체보다 전쟁의 후폭풍으로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인민군 점령 시기의 상황]
인민군은 점령 기간 중 화순군에 내무서를 설치하고 경찰·우익 청년·군인·행정 공무원 등의 색출에 나섰다. 색출 과정에서 다수의 국민 보도 연맹 가입자, 좌익 활동에 대한 비협조자 등을 체포하였고 일부는 광주 형무소로 송치하였다. 1950년 9월 27일 광주 형무소에 끌려간 화순 지역 사람만 200여 명에 달했다는 증언이 있다.
9월 후퇴 시기에는 내무서원과 인민군이 구금된 민간인이나 공무원을 직접 처형하기도 했다. 1950년 9월 28일 화순 지역에서는 약 50여 명의 사람이 화순군 화순읍 교리의 저수지에서 집단 학살되었다.
[수복과 빨치산의 활동]
9월 인천 상륙과 서울 탈환이 성공함에 따라 화순 지역에도 10월 중에 군경이 전역에 배치를 완료했다. 그러나 화순 지역에는 미처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과 지역 좌익이 산악 지대에 은신하여 빨치산 활동을 개시했다. 특히 화순군 백아면에 위치한 백아산에는 조선 노동당 전남 도당과 전남 유격 사령부가 설치되면서 빨치산 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빨치산이 화순군을 활동 거점으로 삼은 것은 일차적으로 지형 때문이었다. 산세가 험하고 산악 기동로를 통해 전라남도 동부는 물론 전라북도 지역과도 원활하게 연결되어 비정규전을 하는 그들로서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광주 지역과도 인접하고 있어 각종 정보와 보급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화순 지역에서의 빨치산 활동은 전선에서 중공군이 맹위를 떨치던 1951년에 최고점에 달했으나 이후 전황의 교착과 외부 보급의 차단으로 곤경에 처했다. 이에 민간인에 대한 보급 의존도가 커져 백아산·모후산 등 산간 지역의 민간인은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950년 8월부터 1952년 4월까지 빨치산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신고된 희생자만 100여 명에 달한 것으로 나타난다.
[빨치산의 토벌과 민간인 희생]
군경의 빨치산 토벌은 1951년 가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후 1952년 초까지 4개 사단이 시차를 두고 화순 지역 등 전라남도 지역의 빨치산 토벌에 투입되었고 여기에 지역 경찰과 우익 청년들도 참여했다. 토벌은 1951년 5월까지 일단락됐으나 소규모 빨치산 대원들과의 교전과 수색은 1955년 7월까지 계속되었다.
토벌 과정에서 좌익 협력자 또는 협력 의심자란 이유로 적지 않은 민간인들이 군경에 희생되었다.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진실·화해 위원회의 선별적인 조사에 따르면, 그 수는 수백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11월 화순군 백아면에서 빨치산 근거지로 오인하여 무고한 마을 주민 1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나 1951년 1월 전신주 파괴를 문제 삼아 이양면 주민 10여 명을 학살한 사건 등도 있었다.
[의의와 평가]
화순 지역에서 6·25 전쟁은 정규군 사이의 전쟁이라는 의미보다는 민간인 학살로서의 전쟁이란 의미가 컸다. 전쟁 기간에 북한 인민군과 우리 군경 모두 상대 진영의 가담자뿐 아니라 가담 가능성을 이유로 민간인을 희생시켰다. 또한 지역 민간인이 가해자 쪽에 동원되면서 전황의 변화에 따라 보복을 당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희생 규모와 지역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