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에는 낮사람들이[군인, 경찰들], 밤에는 밤사람들[빨치산들]이 번갈아가며 마을을 흔들던 1951년 어느 날 새벽 낮사람들이 들이닥쳐 마을 사람 열여덟 명을 총살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날 밤에 인자 반란군들 대장들이나 뭐어니 와가꼬 싹 회의를 했거든. 큰 집이서. 집도 크고 일반 집인디 마당도 넓고 커요. 우리집만이로 마당도 넓고 컸어. 그래갖고 그냥 공산당들 노래 부르고.....
-
1920년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청년 단체. 1920년에 설립된 계몽주의적 성격의 능주 청년회가 신층 청년회로 명칭을 바꿔 다시 갑자 청년회로 개편되었다. 능주 청년회를 모태로 발족한 단체였던 만큼 갑자 청년회의 성격이나 활동은 이전의 능주 청년회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갑자’라는 명칭은 갑자 청년회가 재발족한 해인 1924년이...
-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역사. 19세기 조선은 관료들의 수탈로 인해 농민 경제가 악화되었고, 1876년 일본과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심화되었다. 전라남도 화순 지역은 실학·동학·천주교 등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혼재된 시기를 맞이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기존의 성리학을 비판하며 당시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
-
1948년 10월부터 1955년 7월까지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이 전라남도 화순군을 무대로 활동하던 좌익 무장 세력과 인민군 패잔병을 토벌한 사건. 빨치산이 화순 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데는 화순군의 산세가 험준하여 은신이 용이하고 산자락을 따라 마을이 산재해 현지 보급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산악을 통해 북쪽과 동쪽으로는 소백산맥, 서쪽으로는 노령산맥, 남쪽으로는...
-
일제 강점기에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비롯해 삼남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비밀 결사 조직. 대한 광복단의 화순 지역 활동가들은 주로 부호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여 국내 조직이나 해외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후속 단체인 대한 광복단 결사대의 한훈(韓焄) 등은 1916년 전라남도 보성 지역의 양재성(梁在誠)과 벌교의 서도현(徐道賢)을 처단했으며 서도현의 당질인 서인선을 납치...
-
송정 김영하 선생과 그의 스승 해석 김용상 선생. 도장 마을에서 출생한 이 두 선생의 애국혼은, 지금 마을 입구에 세워진 충혼탑에 오롯이 깃들어 있다. 충혼탑은 선생의 후손들과 마을주민, 그리고 화순군의 도움으로 2007년 12월 30일에 마을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이제 마을에는 두 선생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 선생의 고결한 애국...
-
1929년 광주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학생 독립 운동에 전라남도 화순 지역 출신 학생들이 참가했던 사건. 1919년 3·1 운동이 발생한 지 10년째인 1929년 광주 지역 학생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고, 시위는 이듬해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20년대 학생들의 독서회 활동과 동맹 휴업을 통해 축적된 역량에 기반하여 촉발된 것이었다. 이...
-
개항기 동학 농민 운동 때 화순군 한천면 집강으로 일읍을 수성한 인물. 본관은 능성. 자는 덕서(德瑞), 호는 이섭재(利涉齋). 청계(淸溪) 구희(具喜)의 후예로 아버지는 구본혁(具本赫)이다. 구길모(具吉謨)는 동학 농민 운동 때 한천면 집강이 되어 군수 조존두(趙存斗)와 함께 읍을 수성(守成)하였다. 조정에서는 나중에 가선대부를 증직하였다....
-
6·25 전쟁 전후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국민 보도 연맹 및 예비 검속과 관련하여 발생한 학살 사건. 화순 지역의 국민 보도 연맹의 조직 과정, 규모와 운영을 밝혀 주는 구체적 문헌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약칭 진실 화해 위원회]는 다수의 관련자들로부터 1950년 7월 국민 보도 연맹원에...
-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한학자 하백원의 시문집. 하백원(河百源)[1781~1845]은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서 출생하였는데, 무등산의 남쪽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호를 규남(圭南)이라고 하였다. 여암 신경준, 존재 위백규, 이재 황윤석 등과 함께 18세기 호남의 4대 실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180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때부터 53세까지 학문에 전념하고...
-
조선 말기 화순 출신의 학자·의관인 송주면의 시문집. 송주면(宋宙勉)[1856~1910]은 조선 말기의 순국 지사이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정여(正汝), 호는 규사(圭沙)이며 전라남도 화순 출신이다. 1905년 10월 일제의 침략에 항의하여 정3품의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서 사퇴하였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했다는 비보를 듣고서 ‘우리의...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성옥(聖玉), 호는 효당(曉堂). 아버지는 김기추(金琪錘)이고 어머니는 현풍 곽씨(玄風郭氏)이다. 그의 선조는 대대로 광주(光州)에서 거주하였고, 조부는 광주 각화동에서 살았다. 김문옥(金文鈺)[1901~1960]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소학(小學)』과 『통감(通鑑)』 등을 배웠다. 1914년에 왜인들의 위협에 못...
-
일제 강점기 화순에서 활동한 문인. 본관은 도강(道康). 자는 진옥(振玉), 호는 희재(希齋). 충민공(忠愍公) 김회련(金懷鍊)의 후예이며, 호은(壺隱) 김환호(金煥昊)의 아들이다. 김성기(金聲基)[1884~1951]는 8세에 오재영(吳在永)의 문하에 들어가 수업하였고, 1905년에는 송병선(宋秉璿)과 최익현(崔益鉉)을 찾아가 배웠다.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 살이 하는 동...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송정(松亭). 김영하(金榮夏)[1878~1920]는 1910년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항일 비밀 결사인 광복단 전남 지단에서 활동하였다. 1917년 5월경 동지인 고성후(高成厚)·김교락(金敎洛)·문재교(文在敎)·양기중(梁基重)·양재홍(梁在鴻)·정동근(鄭東根)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여 해외 독립 운동가들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
근대 화순 출신의 문인.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경선(景先), 호는 소정(小汀).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의 후예이며, 진사 치재(致齋) 김덕희(金德喜)의 현손이다. 김용국(金容局)[?~?]은 풍채가 훤칠하고 성품이 온후하였다. 구례군 토지면 덕천정(德川亭)에서 기정진(奇正鎭)의 학맥을 이은 정기(鄭琦)에게 배웠으며, 송명회(宋明會), 김명수(金命洙), 김문옥...
-
개항기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한 화순의 동학 접주. 김용보(金用甫)[?~?] 는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운동 당시 화순 오성산 전투에 참여하고 같은 해 12월 7일 최범구와 함께 체포되어, 신문을 받다가 12월 12일 죽었다....
-
개항기 화순 출신의 학자.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사길(士吉), 호는 우곡(愚谷).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진석(金晉錫)이다. 김윤형(金潤亨)[1876~1905]은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인으로, 경전공부에 잠심하고, 후학 교육에 매진하였다. 1965년에 『우곡 유고(愚谷遺稿)』 2책이 간행되었다. 화순군 춘양면...
-
개항기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한 화순군의 동학 접주. 김자근(金者斤)[?~1894]은 접주(接主)로서 화순에서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2월 7일 김용보, 왕일신, 조번개와 함께 붙잡혀 정식 재판도 받지 않고 죽음을 당하였다....
-
개항기 병인양요 때 활약한 화순 출신의 의병. 조선 후기 1866년(고종 3)에 발생한 병인양요 때에 인근의 유생들과 함께 거의(擧義)한 의병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가(聖可), 호는 율재(栗齋). 진사(進士) 김대기(大器)의 후손이다. 김종국(金鍾國)[?~?]은 1866년(고종 3)에 발생한 병인양요 때 족숙(族叔)인 김인기(金仁基)가 같은 고을의 유생(儒生...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천변리에 있는 다리 건립 기념비. 동복면 소재지와 천변리에서 연월리를 건너가는 하천[동복천]에 다리가 없는 것을 애석히 여겨 오병남[1878~1949]의 부인 김해운 여사가 임종 때 남편에게 다리 건립을 부탁하여 1934년 다리를 건립하고 해운교라 명명하는데, 이를 기려 1935년 기념비를 세웠다. 1934년에 김해운 여사의 임종 유언에...
-
1894년 12월 3일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동학 농민군이 인근 남평 관아를 공격해 점령한 사건. 1894년 최경선(崔景善)[1859~1895]·손화중(孫華仲)[1861~1895]에 의해 시행된 나주 공략의 실패로 능주와 남평 일대에 흩어져 있던 동학 농민군은 남평 관아를 급습하여 잠시 동안 관아를 장악했다. 1894년 9월부터 11월까지 나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학 농민군의 나주...
-
1909년 일본군이 약 2개월에 걸쳐 화순 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의 의병 활동을 진압할 목적으로 실시한 대규모 군사 작전. 통상 남한 대토벌이라 불리는 일본군의 군사 작전은 실제로는 전라남도 지역을 겨냥한 작전이었다. 작전은 1909년(순종 3)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에 걸쳐 진행되었고 일본 정규군 2개 연대가 투입되었다. 이 작전으로 전라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은 심대한...
-
1920년대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농민 계층이 정치적·경제적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벌인 운동. 1920년대 화순 지역은 전라남도에서도 유난히 소작농의 비율이 높은 곳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초반만 해도 화순군의 농민 문제는 지역 청년회와 지주층의 시혜적 관심 대상이었을 뿐이다. 1925년을 전후로 사회주의 청년들의 영향을 받아 점차 농민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농민...
-
1920년대에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사회주의 청년들이 결성한 단체. 능주 노농 청년회은 원래 능주 무산 청년당[무산 청년당]이라는 명칭으로 발족할 계획이었다. 당시 무상 청년당은 ‘무산 대중이 해방되는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명칭과 설립 목적의 과격성을 들어 단체 결성을 불허함에 따라 부득이 능주 노농 청년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그러나 무산 청...
-
1926년 4월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을 중심으로 결성된 노동 운동 단체. 능주 노동회는 1926년 4월 능주 노농회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능주 노농회는 1924년에 결성되어 화순군 능주면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농민 및 노동자 권익을 대변해 온 단체였다. 능주 노농회는 조선 노농 총동맹에 소속됐는데 1926년 조선 노농 총동맹이 농민 운동과 노동자 운동의 분리를 결정...
-
1920년대에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서 결성되어 활동한 농민 운동 단체. 능주 농민회는 1926년 4월 능주 노농회에서 분리되어 창립됐다. 능주 노농회는 1924년 1월에 결성된 단체로 1923년 창립된 화순 소작인 상조회를 제외하고는 화순군에서는 가장 빠른 시기에 조직된 농민·노동자 권익 단체였다. 능주 농민회는 조선 노농 총동맹 아래에 있는 전남 노농 연...
-
1920년대에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을 중심으로 결성·운영된 청년 단체. 능주 청년회는 1920년대 화순군 능주면의 청년 운동과 사회단체 설립의 모체가 되었다. 능주면 출신의 많은 활동가들이 능주 청년회를 정치 및 사회 운동의 터전으로 삼아 성장하였다. 능주 청년회의 창립 당시의 기록은 주로 언론 보도에 불과하여 구체적인 설립 목적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이...
-
1895년 지방 관제 개편 이후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일대를 관할하던 행정 구역의 명칭. 능주군은 영산강 상류의 지석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한 오늘날 전라남도 화순군의 능주면·도곡면·춘양면·한천면·이양면·도암면·청풍면 등 7개 면 지역을 관할하였다. 능주군 일대는 마한 때에는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이 자리하였고, 백제와 통일 신라 때에는 이릉부리군(爾陵夫里郡)과 능성군...
-
1907년 4월 26일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유마리에 있는 고개인 도마치 일대에서 고광순 의병 부대와 관군 사이에 일어난 전투. 도마치 전투는 고광순 부대가 화순군 화순 읍내를 습격한 다음날인 1907년 4월 26일 일어났다. 관군은 고광순 부대의 이동로인 도마치 고개에 매복하여 공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고광순 부대에 얼마간 병력 손실이 발생...
-
2011년 3월 14일[음력 2월 10일]에 도장 마을 회관 앞에서 민간인 학살 희생자를 위한 첫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마을 바로 앞에 위치한 도포배미 논에서 마을 주민들 18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합동 위령제 추진 위원회는 위령제가 학살이 있은 뒤 60년 만에 처음 열리는 만큼 6·25 전쟁 때 도장리 뿐만 아니라 도암면 일원에서 군...
-
근대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거나 타지 출신으로 화순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 화순에서의 독립운동은 한말의 의병 투쟁과 자결 순국, 일제 강점기 3·1 운동과 광주 학생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화순에서 전개된 각종 독립운동은 물론, 지역적으로 인접한 광주에서의 각종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도 여럿이다....
-
1929년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항일 학생 운동 단체인 독서회에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학생이 참여한 사건. 독서회는 항일 의식의 고취와 이에 필요한 지식의 습득을 위해 자생적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독서회는 비밀주의에도 불구하고 광주 지역의 여러 중등학교로 확산되어 1929년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의 준비와 조직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서회 운동은 1926년 광주 고등...
-
1920년대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일원의 유력한 부호와 자제들에 의해 결성 및 운영된 단체.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통치 속에서 화순군에는 청년회 혹은 청년 수양회라는 이름으로 몇몇 단체가 결성되었다. 1920년 5월에 결성된 화순 청년회, 같은 해 7월에 창립된 능주 청년회가 그것이다. 동복 청년회의 결성시기에 대한 자료는 없으나 이들 청년회와 비슷한 시기에...
-
1919년 3월 20일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천변리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화순 지역에서는 1919년 3월 13일 능주 장터에서 첫 만세 시위가 일어난 뒤 3월 15일에 화순읍 남쪽의 갱무산 정상에서 두 번째 만세 시위가 있었다. 동복천변 시장독립 만세 운동은 세 번째 발생한 시위로 동복 보통 학교 학생들이 주도하고 장터에 있던 성인들이 참여했다. 동복...
-
1894년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 운동.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고 12월까지 이어진 나주 공략이 실패하면서 동학 농민군 일부가 화순 지역과 그 인근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그 중 최경선(崔景善)[1859~1895]의 지휘를 받은 농민군이 인접한 남평 관아를 일시 점령하기도 했으나 곧 이은 나주 수성군(守成軍)의 역습...
-
1947년 5월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사평리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메이 데이[노동절] 기념식을 하던 중 경찰의 급습으로 다수가 체포되었던 사건. 미군정기 화순군에서의 좌익 활동은 1946년 10월 30일 화순 탄광 파업이 시작되며 극에 달했다. 11월까지 이어진 파업 중에 전라남도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른바 11월 봉기가 발생한 것이다. 11월...
-
개항기 화순 출신의 학자.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계원(啓元), 호는 구암(龜巖). 면수재(勉修齋) 문자수(文自修)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문치욱(文致郁)이고, 어머니는 양상기(梁相基)의 딸이며 부인은 박홍현(朴弘鉉)의 딸이다. 문송규(文頌奎)[1859~1888]는 화순 출신으로,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하락이수(河洛理數)[개개인의 품성과 운명에 대한 연구]와...
-
근대 화순 출신의 학자.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경오(敬五), 호는 모암(茅巖). 면수재(勉修齋) 문자수(文自修)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묵헌(默軒) 문병환(文炳煥)이고, 어머니는 죽산 안씨(竹山安氏)이다. 문재희(文載熙)[1868~1941]는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명백하며, 총명과 지혜가 뛰어났다. 7세에 능히 문자를 알았으며, 면암 최익현(崔益鉉)에게 나아가서 의...
-
근대 화순 출신의 문인.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구(敬構), 호는 운사(雲沙). 할아버지는 병조 참판 민주현(閔冑顯)이고, 아버지는 민부(閔埠)이며, 어머니는 충주 박씨 만휴(萬休)의 딸이다. 민긍호(閔肯鎬)[?~?]는 시문(詩文)과 서도(書道)에 뛰어났으며, 최익현, 기우만, 송병선 등과 교유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문집 간행에 앞장섰다. 일찍이 『대동 시림(...
-
일제 강점기에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민족 운동. 화순 지역의 민족 운동은 3·1 운동 전까지 1900년대 항일 의병 운동의 흐름과 단절된 채 침체기를 겪었다. 그러나 3·1 운동을 통해 민족 운동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났고 1920년대에 활발한 민족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민족 운동은 초기 청년 단체 중심에서 농민과 노동자 계층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
개항기 화순 출신의 독립운동가. 자(字)는 세원(世元), 호(號)는 춘산(春山). 민치도(閔致道)[1868~1921]는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아들과 친척들에게 100냥을 주어 심남일(沈南一) 의병진에 군자금으로 보냈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정재면(鄭載冕)·주창업(朱昌業) 등과 국민당 및 대동단을 조직하였으며, 1920...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 운동가. 본관은 밀양. 박원경(朴元景)[?~1928]은 일본 메이지 대학[明治 大學]을 졸업하고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대학에서 수학하고 상항 조선 회사에 입사하였으며,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이다 1928년 9월 29일 사망하였다. 미국에서 발간된 『국민보』와 『신한 민보』에 따르면, 유럽을 거쳐 19...
-
근대 화순 출신의 계몽 운동가. 본관은 밀양. 호(號)는 효강(曉岡). 박원조(朴元祚)[1884~1923]는 일본 큐슈[九州] 대학을 수료하고 도쿄 메이지[明治] 대학 재학 중 노백린(盧伯麟)을 만나 교유하였다. 귀국 후 그는 비밀 결사인 화순 우국 동지회를 조직하고 노채필(盧彩弼)·안교일(安敎日) 등과 함께 1919년 3월 24일 화순 장날에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
개항기 화순 출신의 문인.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건서(建瑞), 호는 동계(東溪). 추암(楸巖) 박필혁(朴必赫)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박상태(朴相台)이고, 어머니는 남평 문씨(南平文氏)이다. 박장현(朴璋炫)[1861~1907]은 11세에 『소학(小學)』을 배워 예법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육경(六經)과 백가(百家)의 서적을 섭렵하였으며, 몸소 농사짓고 나무하면서 음영(吟...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화순 탄광을 개광한 실업가. 박현경(朴賢景)[1883~1949]은 7세부터 김여빈(金汝彬)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누이 박농선과 인척 박영효(朴泳孝)의 후원을 받으며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1905년 4월 5일 광업권을 등록하여 정부의 허가를 받아 1908년 채탄을 시작하였으며, 1909년 2월 탄광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도일하였다....
-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의 경제학자. 본관은 밀양(密陽). 박현채(朴玄埰)[1934~1995]는 광주 서중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화순 백아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소년 돌격 부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52년 하산하다 군경에 체포되었다. 1954년 전주 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1955년 서울 대학교 경제학과에...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으로 학생 운동과 건국 운동에 참여한 인물. 박형기(朴炯琦)[1909~1950]는 광주 고등 보통학교 5학년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 학생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11월 3일과 12일의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1930년 2월 26일 광주 지방 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금고 4개월 집행 유예 5년을 언도받아 3개월간 옥고를 치렀...
-
근대 화순 지역 출신의 문신. 자는 윤중(允仲), 호는 성재(醒齋). 아버지는 방환종(房煥鍾)이다. 방채규(房采奎)[?~?]는 1893년에 사헌부 감찰을 거쳐 한말에 동복군 주사(主事)를 지내며 ‘성옹정(醒翁亭)’이라는 별서를 경영하였다. 1908년, 1909년 두 차례나 항일 의병들의 습격을 받기도 하였으며 1914년 조선 총독부에서 목배(木杯)를 수여받았다. 1939...
-
개항기 화순 지역에 우거한 문인.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시보(時寶), 호는 관호당(觀湖堂). 할아버지는 찰방 배두유(裵斗有)이고, 아버지는 주부 배서(裵緖)이다. 배상진(裵尙紾)[?~?]은 위정 척사(衛政斥邪) 의식을 실천하여 주목을 받았다. 마침내 그 학행을 높이 평가한 순찰사(巡察使) 이영욱(李永旭)으로부터 천거되어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벼...
-
근대 화순에서 활동한 학자.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사원(士遠), 호는 인산재(仁山齋). 충간공(忠簡公) 배문우(裵文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의당(義堂) 배상룡(裵相龍)이다. 배현기(裵玄基)[1881~1954]는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과 월파(月坡) 정시림(鄭時林)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본원을 탐구하고 성명(...
-
한국 전쟁 시기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의 백아산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 활동에 대한 국군의 토벌 작전. 화순 지역은 무등산·백아산·만연산·모후산·말봉산·화학산 등 험준한 산악 지역인데다 광주 지역 인근 전라남도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 6·25 전쟁 이전부터 군경 토벌대와 빨치산 간의 격전지가 되었던 곳이다. 6·25 전쟁 시기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궁지에 몰린 조...
-
1894년 12월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벽송리 일대에 은신 중이던 동학 농민군이 지역 민보군과 벌인 전투. 1894년 겨울 나주와 광주 일원에서 관군에 밀린 동학 농민군의 일부는 험준한 산악 지역인 화순 지역으로 퇴각했다. 이곳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농민군은 능주면을 장악하고 다시 12월 3일 지석강 아래쪽인 남평군 관아를 점령하는 등 역습에 성공한다. 그러나 곧이어 나주의...
-
근현대 화순 출신의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변극(邊極)[1903~1980]은 20세 경 불교 단체의 후원으로 상해에 유학하여 동제 대학(同濟大學)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 10월 24일 상해 교민단 동구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25년 5월 30일에는 중국인 학생들과 함께 상해역 앞에서 제국주의 타파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배영 시위(排英示威)에 참여하였다. 1923년...
-
1866년 프랑스가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하며 침략함으로써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체에 영향을 미친 사건. 철종 재위 연간에 천주교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자 프랑스 신부들은 조선에 밀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강화하였다. 1861년(철종 12) 신자 수는 1만 8000명, 1865년(고종 2)에는 2만 30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866년(고종 3) 1월...
-
1949년 10월부터 1951년 3월 사이에 군과 경찰, 그리고 빨치산이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현 백아면)에서 현지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 화순군 북면(현 백아면)은 1950년 9월 이후에 조선 노동당 전남 도당과 산하 전남 유격 사령부가 설치되는 등 빨치산의 본거지 중 하나였다. 군과 경찰은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병력을 투입하여 지속적으로...
-
1960년 4월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운동.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집권 체제에 대한 염증은 6·25 전쟁 이후 조금씩 확산되어 갔다. 1954년 11월 이승만 정권은 권력 연장을 위해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을 헌법에서 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정권은 야당 국회의원을 매수했고 개헌 통과에 필요한 국회의원 수를 임의로 해석한 이른...
-
1919년 3월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 1910년 이후 화순 지역에서는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에 대한 불만이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직후부터 1918년까지 실시된 토지 조사 사업은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관행적으로 인정되었던 경작권을 부정당하고 토지를 강탈당해야 하는 현실을 의미했다. 1918~1919년 사이 화순 지역의 민심은 토지...
-
전라남도 화순군에서 1970년대에 전개된 지역 사회 개발 운동. 새마을 운동은 정부가 범국가 차원에서 농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지역 사회 개발 운동이다.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농촌 개발과 국가 발전을 추구한 개발주의적 사회 혁신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 4월 22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부산에서 열린 가뭄 피해 대책 지방 장관...
-
개항기 화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사필(士弼), 호는 라은(蘿隱). 서강(徐岡)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서광순(徐光淳)이고, 어머니는 나주 임씨 임태갑의 딸이며 부인은 연안 김씨(延安金氏)와 탐진 최씨(耽津崔氏)이다. 서상룡(徐相龍)[1852~1944]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5년 11월에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전국의 거의 모든 서원에 내려진 철폐령에 따라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모든 서원과 사우가 폐쇄된 사건.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집권기인 1868년 조정으로부터 공인을 받지 않는 서원에 대한 철폐 조치가 시행되었고, 1871년에는 전국 47개의 서원과 사우를 제외하고 모두 철폐되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전라남도 장성 지역의...
-
개항기 화순 출신의 애국 지사.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정여(正汝), 호는 규사(圭沙). 이조 판서(吏曹判書) 송일(宋馹)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송치만(宋致萬)이다. 송주면(宋宙勉)[1856~1910]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거쳐 1904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90...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민족 교육 운동가. 본관은 신평(新平). 자(字)는 익중(翼仲), 호(號)는 운인(雲人). 아버지는 송용진(宋容鎭)이고 어머니는 나주 박씨이며 부인은 창령 조씨이다. 송홍(宋鴻)[1872~1949]은 한말의 애국 지사인 송병선(宋秉璿)에게 수학하였다. 1904년 9월 그는 홍종영(洪鍾榮)·이범창(李範昌)·윤흥섭(尹興燮)·윤영섭(尹寧燮) 등과 일본...
-
1920년대 후반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좌·우익의 정치 세력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합작한 정치 조직. 신간회는 1920년대 후반 좌·우익의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한 대표적인 항일 단체이다. 중앙 조직 외에 각 지역에 지회를 결성하였고, 화순 지역에서도 신간회 지회 설립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컸다. 그럼에도 신간회 화순 지회 설립 운동은 좌절하고 실현되지 못하였다. 19...
-
근대 화순 출신의 학자.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여정(汝正), 호는 희암(希庵). 학포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양귀모(梁龜模)이며, 아버지는 양준묵(梁俊默)이고, 어머니는 하동 정씨(河東鄭氏) 정승렬(鄭承烈)의 딸이다. 양재경(梁在慶)[1859~1918]은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할 때 요지를 해득하고 송독함에 있어서는 물이 흐르는...
-
개항기 화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순집(順集), 호는 화은(華隱),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이고, 양제묵(梁悌默)의 아들이다. 양재해(梁在海)[1854~1924]는 면암(勉庵) 최익현(益鉉)의 문인이다. 1906년(광무 10)에 스승 최익현이 태인 무성 서원(武城書院)에서 거의할 때 합류했다. 하지만 남원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패하게 되었다. 최익현의...
-
1919년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으로 화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제주. 자(字)는 길중(吉仲)·경조(景朝), 호(號)는 지강(芝江). 아버지는 양상태(梁相泰)이고 어머니는 낭주 최씨(郎州崔氏)이고 부인은 풍산 홍씨이다. 양한묵(梁漢默)[1862~1919]은 1895년 탁지부 주사가 되어 1895년 능주에서 세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897년 사직한 뒤...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에 있는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지강 양한묵의 무덤. 양한묵(梁漢默) [1862~1919]은 1919년 3·1 운동을 일으킨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하고 3월 1일 태화관에서 개최된 독립 선언식에 참여한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26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으로...
-
근대 화순에서 활동했던 학자. 본관은 제주(濟州). 초명은 회을(會乙), 자는 원숙(元淑), 호는 정재(正齋). 학포 양팽손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양호묵(梁虎黙)이며, 아버지는 현재(弦齋) 양재덕(梁在德)이다. 양회갑(梁會甲)[1884~1961]은 재주와 지혜가 총명하고 영특하여 문리를 일찍부터 성취하였다. 6세부터 할아버지인 양호묵(梁虎黙)에게서 글을 배웠고, 일신재...
-
근대 화순에서 활동한 학자.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처중(處仲), 호는 동계(東溪).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양재욱(梁在郁)이고, 어머니는 안협(安浹)의 딸이다. 한말 의병장 양회일(梁會一)의 동생이다. 양회락(梁會洛)[1862~1935]은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거지가 심중하였으며, 10세에 경전을 통달하였다.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과 노백헌(老栢...
-
개항기 화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연파(蓮坡).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양재욱(梁在郁)이다. 양회일(梁會一)이 형이다. 양회룡(梁會龍)[1881~1959]은 1907년에 형 양회일과 함께 화순군 이양면 쌍산리에서 의병을 모아 거의하였다. 그 후 능주, 화순, 동복의 관아 등을 공격하였고, 광주(光州)로 진군하던 도중 너...
-
근대 화순 출신의 문인. 본관은 제주. 자는 녹여(祿汝), 호는 죽촌(竹村). 양팽손(梁彭孫)의 후예이고, 아버지는 양재연(梁在淵)이다. 양회익(梁會益)[1861~?]은 용모가 단아하고 재주가 뛰어나 사서(四書)·육경(六經)·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다. 시문(詩文)을 잘 지었고 특히 필법이 오묘하였다. 1888년(고종 25)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음...
-
개항기 화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해심(海心), 호는 행사(杏史). 양팽손(梁彭孫)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양재욱(梁在郁)이다. 양회룡(梁會龍)이 동생이다. 양회일(梁會一)[1856년~1908]은 1883년(고종 20)에 쌍봉으로 이사한 후에 근 10여 년을 서울에서 보냈다. 1901년에 다시 쌍봉으로 돌아와 1904년 도적들이 횡행하자 도약장(都約長)이...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운동가. 양회총(梁會鏦)[1919~?]은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 공립 보통학교 재학 중인 1936년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국내 진학이 어렵게 되자 도일하여 동경 정칙 중학교(正則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1937년 항일적 내용이 담긴 일기장이 발각되어 40일간 구금되고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후 지바현[千葉縣] 소재 명륜...
-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화순 출신 한문학자이자 서화가인 염재 송태회의 미간행 필사본 문집. 송태회(宋泰會)[1872~1941]는 호가 염재(念齋), 염재거사(念齋居士), 염재(恬齋), 염와노부(恬窩老夫), 호산(壺山)이며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한문학자이자 서화가이다. 숙부인 사호(沙湖) 송수면(宋修勉)[1847~1916]의 제자로 16세에...
-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 지역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민간인 살상에 반대하여 전라남도 화순 지역민들이 시민군에게 무기를 제공하거나 직접 시위 및 시민군에 참여한 사건.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장악한 정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김대중 등 정치인을 수감하거나 연금했다. 아울러 모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계엄군을 교내까지 배치했다. 광주 지역 전...
-
근대 화순 출신의 관인. 본관은 동복(同福), 호는 소재(小齋). 교관(敎官) 오한추(吳漢樞)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오연수(吳然琇)이다. 아들은 서양화가 오지호(吳之湖)이다. 오재영(吳在永)[1865~1919]은 1907년 광주(光州)에서 9품직에 임용되고 광주부 지방 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09년 보성 군수가 되고 1910년 10월 일제의 강제 병합 후 조선 총독부...
-
개항기 동학 농민 운동 당시 화순의 농민군 지도자. 왕일신[?~1894]은 동학 농민군 지도자로서 전라도 화순에서 동학 농민 봉기에 참여하였다. 1894년 음력 12월 1일 광주에서 퇴각한 농민군 지도자 최경선이 동복으로 내려와 3일 외남면의 벽송리(碧松里)·사평리(沙坪里)에 유숙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를 알게 된 민보군 300여 명이 4일 벽송리를 급습하여 치열한...
-
개항기 화순 출신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이견(利見). 아버지는 학생(學生) 유한수(柳漢樹)이고, 형은 생원(生員) 유사갑(柳思甲)이다. 유사룡(柳思龍)[?~?]은 성품이 너그럽고 화목하였으며, 효도하고 우애하였다. 1888년(고종 2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가선대부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
1987년 6월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운동. 1986년 아시안 게임 이후 전두환 정권은 개헌 요구를 차단하기 위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특히 1987년 4월 13일 대통령 간접 선출을 요체로 하는 헌법의 존치를 발표함으로써 반대 여론을 고조시켰다. 반대 여론은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5월과 6월에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19...
-
1950년~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6·25 전쟁은 1950년 7월 북한 인민군이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점령하고 이후 9월 말엽에 서울 수복으로 퇴로가 차단된 가운데 빠르게 퇴각한 것으로 일단락됐다. 화순 지역에서는 정규군 간의 치열한 전투는 없었고 인민군의 점령 기간도 2개월 정도에...
-
1950년 9월 북한 인민군의 퇴각 이후 대한민국 군경과 빨치산이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대치 및 전투하는 과정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 화순 지역의 민간인 학살은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 작전이 진행되던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학살은 군경과 빨치산 모두에 의해 일어났다. 전라남도 지역의 좌익 세력과 인민군은 1950...
-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6·25 전쟁 때까지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산 일대에서 국군과 북한 비정규군[빨치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백아산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남한에 고립된 북한군과 좌익 게릴라들이 순창 회문산 및 지리산 등과 더불어 아군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던 격전지의 한 곳이다. 백아산 일대에서 활약한 유격대는 여수·순천 사건의 잔류 반란 세력과 탄압을 받은 좌파...
-
개항기 화순 출신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치오(致五), 호는 죽남(竹南)이다. 아버지는 윤우은(尹佑殷)이다. 윤복형(尹福衡)[?~?]은 고종(高宗) 을축년(乙丑年)[1865년]에 경복궁 중건 사업을 시작할 때 밭을 매각하여 상납하고 병인양요(丙寅洋擾) 때에도 전토(田土)를 방매(放賣)하여 양희영(梁禧永), 양정환(梁珽煥), 김인기(金仁基) 등에게 노자를 보급...
-
1895년부터 1911년까지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항일 항쟁. 1895년(고종 32)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시행으로 호남 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시작되었고, 화순 지역에서도 이에 동참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그러나 당시 화순 지역 인사들의 활동은 개인 자격으로 외지에서 일어난 거병에 참여하는 수준이었다. 1896년 능주 지역의 정의림이...
-
개항기 화순 출신의 의병장. 이관회(李貫會)[1871~1910]의 본적은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이다.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후 보성에서 봉기한 안규홍(安圭洪) 의병 부대에 가담했다. 1908년 2월부터 1909년 7월까지 선봉장으로 활동하며 보성·고흥 일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8년 8월에는 파청에서 수호(水戶)와 평정(平井)이 지휘하는...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 운동가. 이덕우(李德宇)[1908~1950]는 전라남도 화순군 출생으로, 본적은 전남 화순군 동면 대포리 292번지이다. 전남 공립 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7월 초순 수피아 여학교 뒷산에서 송동식(宋東植)·이신형(李信珩)·홍귀주(洪貴周) 등 10여 명과 함께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들은 다시 9월...
-
근대 화순 출신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광견(光見), 호는 죽오(竹塢). 양도공(襄度公) 이천우(李天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문계(李文繼)이고, 어머니는 화순 최씨(和順崔氏) 최봉권(崔鳳權)의 딸이다. 이상백(李常白)[1857~1924]은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인으로, 조용하거나 혼자 있는 곳에서도 삼가 몸을 지키고, 성리학의 깊은 뜻을 명...
-
근대 화순 출신의 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덕수(德受), 호는 양곡(良谷).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동표(李東杓)이고 어머니는 장흥 고씨 고경진(高敬鎭)의 딸이다. 생부는 이동고(李東高)이다. 이승복(李承福)[1886-1961]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으며, 종형인 죽곡(竹谷)에게서 수학하였고, 자라서는 일신재(日新齋) 정의림...
-
근대 화순에서 활동한 학자.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관여(寬汝), 호는 난계(蘭溪).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지호(李贄鎬)이다. 이승우(李承愚)[1855~1919]는 화순 출신으로,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재주가 영오하고 뜻이 확고하였다. 과거 시험 공부를 전폐하고 경전 공부에 침잠하였다. 노사(蘆沙)...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승정(李承正)[1871~1924]은 1910년 8월 경술국치 직후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 국수(國讐)를 갚지 못하고 어찌 가히 집에 거(居)하여 도식 투생(徒食偸生)하리오”라며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서울 동대문 김태영(金泰榮) 집에 기숙하며 1914년 9~11월 김규석(金圭錫)·유병하(柳秉夏) 등에게 “국권 회복...
-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의 근현대 유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우석(愚石). 아버지는 이길주, 어머니는 백내지이다. 6남매 중 장남이다. 이진백(李鎭白)[1928~2012]은 천성이 중후하고 의지와 기개가 비범하였다. 곡성 완계 초당(浣溪草堂)에서 안훈(安壎)에게, 능주 수산 정사(壽山精舍)에서 배석면(裵錫冕)에게 수학하며 경적을 강구(講究)하였다. 학문을...
-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역사. 전라남도 화순군은 조선 시대에 능주목·동복현·화순현의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786㎢의 지역이 능주목·동복현·화순현 세 개의 행정 단위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화순 지역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능주목의 면적은 화순 지역 전체의 약 45%, 동복현은 3...
-
일제 강점기 화순군의 관리. 본관은 장흥. 호(號)는 소산(小山). 임태현(任泰賢)은 방은(芳隱) 임호응(林鎬應)에게 수학하였다. 1921년부터 1924년까지 화순 군청 및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국민회 화순군 부회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
1945년 8월부터 10월까지 전라남도 화순 지역 화순 광업소의 재산과 운영을 위해 현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제반 시설을 관리했던 일. 화순 광업소는 광복 이전에는 종방 탄광과 남선 탄광의 두 사업체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945년 12월 미군정에 의해 화순 광업소로 통합되었다. 화순 광업소는 화순군에서 가장 큰 단일 사업체였으며 당시 국내 석탄의 80%가 북한 지역에...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희수(張熙洙)[1924~1986]는 1943년 10월 중순 경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되어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읍 지구(安邑地區) 주둔 일본군 3541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던 중 1940년 중경 임시 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는 것을 알고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 1944년 12월 부대를 탈출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1945년 4...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계몽 운동가. 정병의(鄭炳儀)[1905~1954]는 1932년 11월부터 1934년 7월까지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현 백아면]의 면서기로 근무하다 퇴직하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6년 2월 5일 북면사무소에서 면장 박경조(朴炅朝)가 도로 공사비의 면민 부담을 위해 유지들을 소집하여 개최한 간담회에 참석하여 상세한 예산 내역의 설명을 요구하면서...
-
개항기 화순 출신의 학자. 본관이 하동(河東). 자(字)는 권숙(權淑), 호는 서은(瑞隱). 둔재(遯齋) 정여해(鄭汝該)의 후손이다. 정순백(鄭淳伯)[?~?]은 타고난 품성이 중후(重厚)하여 향교에 정성을 쏟았다. 특히 향교 대성전 석전제(釋奠祭) 행사에 쓰이는 제사 비용을 위해 전답 2두락을 헌납하였다. 미풍양속을 위해 노력하고 향교에 대해 베푼 정성과 그의 품행을 고...
-
한말 화순군 백아면 원리 출신의 의병. 1907년에 고광순(高光洵)의 의병 부대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일을 하였으며, 1908년 연곡사 전투에서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하(景河), 호는 남파(藍坡). 계림군(鷄林君) 정효상(鄭孝常)의 후손으로, 현감 정약이(鄭樂易)의 6세손이고, 아버지는 모암(慕庵) 정정현(鄭貞鉉)이다....
-
조선 후기 화순군 능주면 출신인 한문학자 정의림의 시문집. 정의림(鄭義林)[1845~1910]은 본관이 광산(光山)으로 능주(綾州) 대덕(大德)에서 태어났다. 호는 일신재(日新齋)로 정제현(鄭濟玄)의 아들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으로 천문·지리·역학·복서 등에 뛰어났다. 『정일신 유집(鄭日新遺集)』이 있다. 목활자본이다. 사주 쌍변(四周雙邊)으로, 반곽 치수는 22....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 운동가. 정찬규(鄭燦圭)[1913~1966]는 전남 목포 공립 상업학교에 3학년 재학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학교 최창호(崔昌鎬) 등과 수차 회합하여 목포에서도 같은 달 19일에 동조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감금 학생 즉시 탈환”, “치안 유...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운동가. 1893년 5월 20일 출생. 본적은 전남 화순군 동복면 칠정 279번지. 주소는 경북 대구부 서성 39. 이명은 정대봉(鄭大鳳), 정찬(鄭贊), 송계(松溪). 정태봉(鄭太鳳)[1893~1942]은 1920년 10월경 상해 임시 정부 특파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김두환(金斗煥) 등과 함께 그해 11월 25일부터 1921년 2월까지 68...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 운동가. 아버지는 정해업(鄭海業)이고 어머니는 최영온(崔英溫)이다. 정효룡(鄭孝龍)[?~?]은 1917년 부친 정해업(鄭海業)을 따라 형제들과 함께 광주에서 화순군 능주면으로 이주하였으며, 여기서 1919년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가 50일간 수감되었다. 1920년 3월 상해로 건너가 임시 정부의 기관지인 『독립 신문』의 직원으로 근무...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 있는 도곡 중앙 초등학교 관련 장학 공적비. 제주 양씨 칠 종형제 장학 공적비는 화순군 도곡 중앙 초등학교의 개교와 운영을 알 수 있는 공적비로, 1972년 5월 7일 건립하였다. 제주 양씨 학포 양팽손의 칠대손 종형제 7인이 삼지재 서계(三芝齋書禊)를 운영하여 1921년 의숙 학교를 개설하고 1934년에 계답(契畓) 70두락을...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계현(曺繼鉉)[1908~1937]은 광주 고등 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6월 무등산에서 성진회(醒進會) 출신인 광주 고등 보통학교 졸업생 장재성(張載性)의 지도로 김상환·오쾌일·주경석 등과 함께 광주 고등 보통학교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독서회는 장재성 등이 같은 달 결성한 독서회 중앙 본부 산하에 두고 조사 선전부·...
-
개항기 동학 농민 운동 당시 화순군의 접주. 조번개[?~1894]는 접주(接主)로서 전라도 화순에서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2월 7일 왕일신[왕왈신], 김용보, 김자근과 함께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1894년 음력 12월 1일 광주에서 퇴각한 농민군 지도자 최경선이 동복으로 내려와 3일 외남면의 벽송리(碧松里)·사평리(沙坪里)에 유숙하며 전열을 가다듬었...
-
개항기 병인양요 때 활동한 화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화(汝化), 호는 송곡(松谷). 죽림(竹林) 조수문(曺秀文)의 후손이고, 조령원(曺齡源)의 아들이다. 조병섭(曺秉燮)[?~?]은 병인양요에 창의(倡義)하여 강화(江華)에 이르렀으나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돌아왔다. 1869년(고종 6) 광양 농민 봉기(光陽農民蜂起)에 화순 현감(和...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창녕. 자(字)는 남조(南助). 조병열(曺秉烈)[?~?]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부터 국내에 잠입한 신덕영(申德永)을 도우며 1920년 7월 화순의 노석중(盧錫仲)·노형규(盧衡奎)·윤영기(尹永奇)·조병철(曺秉徹)·최양옥(崔養玉) 등과 함께 박현경(朴賢景) 등 부호로부터 군자금을 모으다 같은 해 11월 일경에 체포되었...
-
개항기 병인양요 때 활약한 화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죽포(竹圃)이다. 조익은(曺翊殷)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조대진(曺大振)이다. 조석기(曺碩麒)[1859~?]는 1880년(고종 17)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후 1866년(고종 3)에 병인양요[1866]가 발발하자 셋째 아들 조양승(曺兩承), 조카 조의승(曺儀承)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
광복 직후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조직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화순 지부 조직.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는 여운형(呂運亨)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전라남도 지역 지부 조직이다. 결성 당시 채택한 강령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완전한 독립 국가의 수립’, ‘민주주의 원칙 준수’, ‘치안과 질서 유지’ 등이 설립 목적이었다....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준기[1891~1929]는 1920년 능주 청년회 창립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21년에는 능주 청년회 회장에 선출되어 계몽 운동을 벌였다. 이후 광주로 이주한 뒤, 1924년 7월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동맹 휴학을 벌인 광주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이 무기 정학 처분을 받자 그 수습을 위한 도민 대회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였...
-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청년들이 일으켰던 사회 운동.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통치 속에서 결사의 자유가 일부 허용되며, 화순군에는 1920년 이후 다양한 청년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청년 단체는 1920년대 중반까지 화순면·능주면·동복면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1908년과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통합되기 이전 옛 지역들의 분절적인 사회 조직...
-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의 해방 이후 건국 운동에 참여한 인물. 본관은 해주(海州). 자(字)는 기운(起雲), 호(號)는 중오(中悟)이다. 최명수(崔明洙)[?~?]는 중일 전쟁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국내에 잠입하여 은신하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귀향하여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전남 지부 총무부장, 국민회 전남 본부 사무국...
-
개항기 화순군에서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한 농민. 최범구(崔範九)[1849~1894]는 화순 지역에서 최경선 등과 함께 동학 농민군을 모아 남평 전투 등에 참여하였으며, 화순 벽송 마을까지 후퇴하면서 항전하였으나, 체포되어 신문을 받다가 죽었다....
-
개항기 화순군에서 동학 농민 혁명 운동에 참가한 농민. 최성칠(崔性七)[?~1894]은 동학 농민 혁명 운동 당시 화순 오성산 전투에 참여하고 같은 해 12월 7일 최범구와 함께 붙잡혀, 신문을 받다가 12월 12일 죽음을 당하였다....
-
전라남도 화순 지역 출신 광복군 3명이 포함되어 해방 직전까지 활동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대. 한국 광복군은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충칭[中京]에 머물렀던 시절에 창설되었다. 이후 1946년 5월에 공식적으로 해산할 때까지 6년여 동안 중국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직전 규모는 총사령부와 3개 지대였고 병력 수는 700여명 정도였을 것으...
-
개항기 동학 농민 운동에 참가한 화순군 출신의 동학 접주. 한달문(韓達文)[1859~1895]은 나주 농민군 접주로 나주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 접주로서 나주 지역 대장으로 활동 중 1894년 12월 중 나주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12월 20일 나주옥에 수감되었다. 이 때 우진영에 인도되어 엄한 문초를 받았다. 이후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어 구명을 요청하...
-
1900년대에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관리와 지식인 등 지역 엘리트층이 주도한 자강 운동. 19세기 말엽부터 전개된 동학 농민 운동과 의병 운동, 위정척사 운동은 점차 노골화되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무력 항쟁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를 자각하고 대신 서구 문물을 수용하면서 점진적으로 역량을 키우자는 주장이 일부...
-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역사.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 소식이 전해지자 화순 지역은 광복을 맞이할 준비에 착수했다. 8월 15일 화순 지역의 주요 인사들은 독립 운동가 주재학의 집에 모여 적산 관리와 치안 유지 등을 논의했고 그 흐름이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는 10월 초...
-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홍귀주(洪貴周)[1906~?]는 전남 공립 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7월 초순 수피아 여학교 뒷산에서 송동식(宋東植)·이덕우(李德宇)·이신형(李信珩) 등 10여 명과 함께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들은 다시 9월 중순 광주 형무소 뒷산에서 성진회(醒進會) 출신인 광주 고등 보통학교 졸업생 장재성(張載性...
-
1919년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연양리 연동 마을 근처 갱무산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1919년 3월 15일 조국현의 주도로 일단의 청년들이 당시 화순군 화순면 소재지 인근의 야산인 갱무산에 올라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고 만세 사건으로 일부 참여자들이 체포되었다. 갱무산 독립 만세 운동은 화순 지역에서 3월 13일에 일어난 능주 장터 시위에 이어 두 번째로 일어난 만세 운동...
-
6·25 전쟁 중 북한이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치안과 반대 세력의 색출 등을 위해 조직한 경찰 기구. 화순 내무서는 1950년 7월 북한군이 화순 지역을 점령하면서 치안과 반대 세력의 색출 등을 위해 조직하였고 화순 경찰서 건물을 사용하였다. 외견상 점령 지역의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다고 하나 6·25 전쟁을 혁명 과정으로 보았던 탓에 이른바 반혁명 세...
-
1926년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창립된 노동조합. 1924년 결성된 전국적인 노동 단체인 조선 노농 총동맹은 1926년 노농 운동을 노동자 운동과 농민 운동으로 분리하여 전개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이를 가맹 단체에 지시했다. 화순군 능주 지역에서는 1924년에 결성된 능주 노농회가 1926년 4월 능주 노동회와 능주 농민회로 분리되어 발족했다. 반면에 화순면[현 화순군 화순읍]일원...
-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일부 시위대가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경찰 지서의 무기고에서 총기와 탄약을 확보하고 광주로 돌아가 신군부의 계엄군에 저항한 사건. 1980년 5월 21일 광주 지역에는 계엄군의 발포 소식이 삽시간에 시내 전역으로 전해졌다. 계엄군의 발포 소식을 접한 시민들과 시위대는 자기 방어 수단으로서 무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됐다. 시민들과 시위대 중...
-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부곡리 춘산사(春山祠)에 배향된 문달환(文達煥)의 초상화. 둔재(遯齋) 문달환[1852~1938]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7]의 문인으로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강탈당하자 항일 봉기를 하다 대마도로 압송된 항일 의사이다. 문달환은 일본군 사령부에서 당한 가혹한 고문으로 다리가 불편해져 일생을 두문불...
-
전라남도 화순 지역 출신의 양회일(梁會一)이 이끈 의병 부대의 창설지이자 주둔지. 화순 쌍산 항일 의병 유적은 양회일[?~1908]이 거병하고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던 곳으로 흔히 쌍산 의소라고 부른다. 1907년 이곳을 거점으로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흔적이 이양면 증리 일대에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직선거리로 3㎞ 떨어진 곳에는 양회일의 집터...
-
1928년 창립되어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 청년 운동 단체. 1924년 4월 서울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 단체들이 모여 조선 청년 총동맹을 결성했다. 화순군에서도 4월에 능주 청년회와 동면 청년회, 1926년 6월에 화순 청년회가 조선 청년 총동맹에 가입했다. 그러나 1927년까지도 전라남도 화순군의 사회주의 청년 단체들을 묶은 단일 조직은 없었다. 192...
-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유지 및 청년들이 결성·운영했던 사회 운동 단체. 화순 청년회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정치의 시기가 도래하면서 출범했다. 기록상 화순군 화순면[현 화순군 화순읍] 최초의 청년 단체는 1920년 4월 화순 유지들의 찬조를 받아 화순 보통 학교 교사인 국진호와 정준호가 설립한 화순 청년 구락부였다. 화순...
-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부곡리 춘산사(春山祠)에 배향된 최익현(崔益鉉)의 초상화. 면암(勉庵) 최익현[1833~1907]의 초상은 고종(高宗)의 초상을 그렸던 어용 화사(御用畵師) 채용신(蔡龍臣)[1850~1941]이 1911년에 비단에 채색을 사용하여 그린 작품으로 크기는 가로 62.7㎝, 세로 99.3㎝이다. 최익현의 제자였던 둔재(遯齋) 문달환(文達煥)[...
-
1946년 전개된 전라남도 화순 지역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 광복 후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은 크게 1946년 2월 24일부터 3월 11일까지의 해고 사건, 1946년 8월 15일의 해방 1주년 기념일 사건, 1946년 10월 31일부터 11월 9일까지의 10월 추수 항쟁 기간의 식량 투쟁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다. 화순 탄광 노동자 투쟁은 광복 후 일...
-
1947년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화순 탄광 지배인이 광부들의 임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던 사건. 광복 직후 석탄은 조선의 중추적인 에너지 자원이었기 때문에 석탄에 대한 미군정의 관심은 높았다. 화순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에 개발된 종방 탄광과 남선 탄광이 있었는데 미군정은 탄광의 운영을 맡으면서 이를 하나로 통합해 화순 탄광이라고 불렀다. 1947년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
1946년 10월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 탄광의 광부들이 식량 배급량과 인금의 인상을 요구하며 일으킨 파업. 화순 탄광 파업은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이른바 ‘10월 폭동’과 발생 시기가 겹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화순 탄광 파업 이후 미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 세력은 파업을 주도한 좌익 성향의 조선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약칭 전평]의 영향력을 제거하...
-
6·25 전쟁 중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비롯한 북한군의 점령 지역에 설치되었던 통치 조직. 북한 인민군 점령 기간에 화순 지역을 비롯한 모든 점령지에는 각종 통치 조직 및 외곽 단체들이 설치되었다. 인민 위원회는 이러한 통치 조직을 대표하는 것으로 외형상 지역 주민들의 선거로 선출된 인민 위원들로 구성되었다. 인민 위원회는 조선 노동당 화순 군당과는 별개 조직...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훈리에 있는 근대 건축물. 화순 농협 동부 지점은 일제 강점기인 1922년경에 금융 시설로 지어진 건물이다. 화순군청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는 현대식 건물이 있고 전면에는 2차선 도로가 있다. 건물 외부는 어느 정도 건립 당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나 내부는 현 금융 업무에 맞게 개·보수가 되어 있다. 앞에서 보면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