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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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港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덕진 |
의병활동지 | 쌍산의소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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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역사.
[개설]
19세기 조선은 관료들의 수탈로 인해 농민 경제가 악화되었고, 1876년 일본과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심화되었다. 전라남도 화순 지역은 실학·동학·천주교 등 새로운 사상과 이념이 혼재된 시기를 맞이하였다.
[문화]
조선 후기에는 기존의 성리학을 비판하며 당시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학문 태도를 강조한 실학이 나타났다. 실학자 중에는 화순 지역의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천문 관측 기구나 생활 과학 기구를 창조하였다고 하는 나경적(羅景績)[1690~1762]은 동복현에서 자랐고, 자동 양수기인 『자승차도해설(自升車圖解說)』, 『자승도해(自升圖解)』를 저술하여 농정 수리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하백원(河百源)[1781~1844]은 지금의 이서면 일대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연구는 화순 지역이 호남 실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 후기 서원은 혈연·지연 및 당파 등과 연결되어 이익 집단화되었고, 토지가 면세되고 노비가 면역되는 등 특권을 남용하였다.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전국에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대부분의 서원을 정비하였다. 이로 인해 1868년(고종 5)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죽수 서원(竹樹書院)과 도원 서원(道源書院)도 훼철되었다.
근대 문물이 유입되면서 1908년 근대식 학교인 능주 육영 보통학교[현재 능주 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이듬해에는 사립 동진 학교[현재 동복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화순 지역의 근대화는 이러한 근대식 학교를 매개로 진전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도 문인들은 시·서·화를 함께하는 경우가 많았다. 화순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남면 지역에서 태어난 송수면(宋修勉)[1847~1916]이 있다. 그는 사군자, 산수와 호접, 모란, 포도 등을 그렸고, 특히 호접도에 능해 송나비로 불리기도 하였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화접도 병풍」에는 나비·화훼·괴석이 그려져 있다.
[사회]
조선의 관료 사회는 세도 정치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관리의 매관매직이 성행하였으며 농민에 대한 가혹한 착취가 빈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가 발생하고, 1876년에는 운요호 사건을 기화로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면서 조선은 내·외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농민들은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게 되었고 최제우가 평등 사상과 반외세 민족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동학을 만들었고, 이는 농민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동학 농민 전쟁은 1894년에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시작되었다. 화순 지역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나주성 공방전과 제2차 봉기에서 동학 농민군에게 중요한 곳이었다. 나주에서 패한 최경선(崔景善)[1859~1895]은 화순 지역으로 피한 후 화순 지역 일대의 농민군으로 남평을 함락시켰다. 동복으로 향하던 최경선은 벽송 마을[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벽송리]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패배하고 체포되었다. 화순 지역은 이후에도 동학 농민군의 주요한 거점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무력에 좌절하고 말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정의림(鄭義林)[1845~1910]이 나주 의병에 참여하였고, 을사조약 이후 문달환(文達煥)[1851~1938]과 양재해(梁在海)[1853~1924]가 태인 의병에 참여하였다. 이관회(李貫會)[1871~1910]는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인해 화순 지역에서 은신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활동한 화순 지역 의병으로 김경문(金景文)[?~?), 민치도(閔致道)[1868~1921], 박덕삼(朴德三) 등이 있는데 대체로 심남일(沈南一)[1871~1910], 안규홍(安圭洪)[1879~1911], 고광순(高光洵)[1848~1907]의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개항기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 활동의 거점으로 쌍산의소(雙山義所)가 있다. 의병들이 이양면에 있는 계당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계당산 일대를 쌍산이라 불렀던 것에서 쌍산 의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1907년 양회일(梁會一)[?~1908]·임상영(林相永)·임노복(林魯福)[1853~1909] 등이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쌍산 의소에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굴, 의병성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경제]
조선 시대의 화순 지역은 능주목·화순현·동복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895년에 전라도 나주부 화순군·능주군·동복군으로 개편되었고, 이듬해 전라남도 화순군이 되었다. 고을 이름으로 화순군이 결정된 데에는 화순의 대지주였던 박현경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4월 5일 박현경이 전남 탄광의 광업권을 등록하고, 비슷한 시기에 일본인 혼다[本多]가 다른 광산 회사를 운영하였다. 화순 지역은 예부터 농업이 중심이었으나 이때부터 탄광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