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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384
한자 靈圭大師傳說
영어의미역 Legend of Great Priest Younggyu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집필자 이은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인물전설|역사전설
주요 등장인물 영규대사|휴정대사|조헌|왜적
관련지명 계룡면 유평리|계룡산 청련암|청주|금산지도보기
모티프 유형 수행으로 왜적을 무찌른 스님

[정의]

충청남도 계룡면 유평리에서 영규대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채록/수집상황]

1973년 임헌도 교수가 갑사에 가는 도중 만난 구십 노인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채록하여 『한국전설대관』에 수록하였다. 제보자는 갑사에 가는 도중 만난 구십 노인이다.

[내용]

영규대사공주시 계룡면 봉명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외로운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어느 날 나뭇짐을 받쳐놓고 잠시 쉬고 있는 데, 지나가던 스님이 “잉어가 개천에 있구랴!”하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 뜻을 물은 즉 이렇게 묻혀 썩을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하였다.

그 후 영규대사는 노스님을 뵈러 계룡산에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낙담하였다. 그는 입산하리라는 결심을 굳히고 청련암이라는 작은 암자에 가서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나무를 해다가 공양을 짓는 고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났다.

영규대사는 급기야 용단을 내려 멀리 묘향산에 계신 휴정대사를 찾아 길을 떠났다. 휴정대사는 찾아온 뜻을 아뢰자 영규대사를 받아들였고, 그는 수행을 거듭하여 휴정대사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다. 하루는 휴정대사영규대사를 불러 나라의 운이 심상치 않으니 내려가 힘을 모을 것을 권했다. 영규대사는 충청도 공주 고향에 돌아왔다.

영규대사계룡산 청련사의 스님들은 반갑게 맞았다. 영규대사는 날이 새기만 하면 산 속으로 가서 작대기만한 참나무를 잘라 한 짐씩 져오곤 하였다. 그는 나무토막 한쪽을 날카롭게 깎은 다음 마루 밑에 차곡차곡 쌓았다. 마루 밑에 나무가 꽉 찬 그날이었다.

왜놈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난리가 났다 하여 인심은 말할 수도 없이 흉흉하였다. 영규대사계룡산 일원에 있는 스님들에게 모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모두 구국의 대열에 나서서 도탄에 빠진 중생들을 건져야 된다는 영규대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지자 승려들은 하나 둘 참나무 창을 들고 영규대사의 뒤를 따랐다.

영규대사 주위에는 어느새 500명의 스님들이 몰려들었다. 영규대사는 그들을 이끌고 그 길로 청주로 향했다. 영규 승병장과 조헌 의병장은 합세하여 왜군을 무찔렀고, 여세를 몰아 금산 쪽으로 진격해 싸웠다. 그러던 중 영규대사가 왜놈의 조총에 배를 맞아 쓰러졌다. 영규대사는 흘러 내려오는 창자를 움켜쥐고 싸웠다.

영규대사는 우선 갑사에 잠시 숨었다가 다시 힘을 규합할 목적으로 부하의 부축을 받고 계룡면 월암리 지금의 계룡면사무소 앞에 이르렀으나,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근 유평리에 시신을 모시게 되었고, 운명하신 길 옆에 비각을 세워 기린다고 전한다. 이 비각은 1633년(인조 11)에 대시주(大施主) 이덕윤(李德潤), 유중(柳重) 등이 돈을 내어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1738년(영조 14) 나라에서 공주 갑사 경내에 표충원(表忠院)을 세워 이곳에 영규대사를 모시도록 했다. 현재 갑사에서는 매년 영규대사 대제를 올리고 있다.

[모티프 분석]

영웅의 전기적 전설 모티프로 임진왜란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전설이다. 「영규대사 전설」은 인명전설로 역사전설과 관련이 깊다.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 그 행적에 관한 유래담이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들의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라와 겨레에 바친 영규대사의 충의는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 또한 영규대사 이야기는 공주시민의 긍지와 자랑거리로 오래도록 간직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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