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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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靈圭大師 |
영어음역 | Younggyu Daesa |
영어의미역 | Great Priest Younggyu |
이칭/별칭 | 기허(騎虛)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고수연,박범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승려이자 승병장.
[가계]
속성은 박씨(朴氏)이고,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기허(騎虛)이다.
[활동사항]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한 뒤 사명대사 유정(惟政)과 함께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문하에서 법을 깨우쳐 휴정의 제자가 되었다. 공주 천련암(天蓮庵)에 있으면서 선장(禪杖)을 가지고 무예를 익히기를 즐겼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수백 명을 규합하였는데, 이때 승병을 조직한 것은 영규가 최초로서 전국에서 승병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영규대사는 1592년(선조 25) 8월 1일 휘하의 승병 500명을 이끌고 유학자 출신인 의병장 조헌(趙憲) 및 박춘무가 이끄는 관군 병력과 함께 청주성 전투에서 활약하여 조선군이 청주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영규대사는 1592년 8월 18일 조헌과 함께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한 전투였던 금산성 전투에서 최후까지 왜군과 맞서 호남 침공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부상을 입고 그 해 8월 20일 현재의 비각이 있는 자리에 돌아와 숨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묘소]
영규대사는 현재 정려비가 자리한 계룡면 월암리에서 사망했으나, 이후 갑사의 승려들이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산5번지에 그의 묘소를 마련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영규대사의 방계 후손인 박경진과 박경태 등이 묘비를 새로 단장하고 묘역을 정비하였다. 이후 최근까지도 묘역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봉분과 상석 사이에 있는 높이 87㎝, 너비 37㎝, 두께 14㎝의 묘비 앞면에는 “의병승장군영규지묘(義兵僧將軍靈圭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칠대방손박경진경태봉사(七代傍孫朴景震景兌奉祀)가 묘비를 세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인 승병장이었던 영규대사를 기리는 사우(祠宇)와 정려(旌閭)는 많은 편이다.
영규대사가 전투를 벌인 금산 지역의 종용사에 영정을 배향하였고, 1738년(영조 14) 영규대사가 불도를 닦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에 표충원을 세우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맞아 싸운 승병장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영정을 배향하였다. 갑사 표충원은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1813년(순조 13) 명정을 받아 충청남도 계룡면 소재지 우체국 옆에 영규대사 정려를 세웠다. 정려비각은 최초 건립 연대가 불명확하며 현재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갑사 표충원에서는 매년 10월,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영규대사와 칠백 의승의 넋을 기리는 대제가 열린다. 2000년 11월 5일 첫 대제가 개최되었으며, 이후 매년 이어져 오고 있다. 이 행사는 갑사와 육·해·공군 승단, 신도 단체 등의 주관으로 진행되며, 학술회의와 산사음악회, 환경사진 전시, 불교 무술 시범 등 다채로운 부대 행사도 열린다. 특히, 영규대사의 호국정신과 승병들의 희생을 기리는 자리로 많은 관심 속에서 성대히 치러지고 있으며, 행사의 내용도 점차 풍성해지고 있다.
또한 청주시에서도 영규대사가 활약한 1592년 청주성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96년부터 매년 9월 6일 청주성 탈환 기념 시민한마당 큰잔치를 열어 여러 가지 행사를 시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