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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575
한자 全義李氏三位孝烈旌閭
영어의미역 Memorial Monument for Faithful Sons and Virtuous Ladies Jeonui Yi Clan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대중리1길 128[대중리 4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춘진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려
건립시기/일시 1724년[이진성]연표보기|1729년[이연회]연표보기|1736년[청송심씨]연표보기
정면칸수 1칸
측면칸수 1칸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대중리1길 128[대중리 446]지도보기
문화재 지정번호 공주시 유형문화유산
문화재 지정 일시 2012년 4월 16일연표보기 - 전의이씨삼위효열정려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36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4년 5월 17일 - 전의이씨삼위효열정려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36호에서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변경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대중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세 쌍의 효열 정려.

[개설]

전의이씨삼위효열정려는 1729년(영조 5)에 명정을 받은 이연회(李延會)[1648~1690]와 1736년(영조 12)에 명정을 받은 이연회의 처 열녀 청송심씨, 그리고 1724년(영조 1)에 명정을 받은 이진성(李晋聖)[1668~1708]의 효행과 절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전의이씨삼위효열정려는 2012년 4월 16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위치]

공주에서 청양 방향으로 국도 32호선을 따라 20㎞ 정도 가다 보면 사곡면소재지의 태화교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 마곡사 가는 길을 따라 4㎞ 정도 가면 회재고개가 있다. 이 고개를 넘어 1㎞ 정도 가면 도로 오른쪽에 대중리 입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500m 정도 들어간 곳에 있다.

[변천]

이연회의 자는 자향(子享)으로, 사복시 주부를 지냈다. 우의정을 역임한 이상진(李尙眞)[1614~1690]과 연안김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상진은 숙종 때 인현왕후 폐위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북청·철원·종성 등지로 귀양을 갔다. 그때 효심이 깊은 아들 이연회가 아버지의 귀양지까지 맨발로 찾아갔다고 한다. 이후 이상진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1690년(숙종 16) 사망하였다. 이연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에 세상을 떠났는데, 맨발로 귀양지를 다니면서 얻은 발의 피부병(瘡病)을 얻은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청송심씨는 이연회의 두 번째 부인으로, 참봉 심지호(沈之灝)의 딸이었다. 이연회가 죽자 세 달 동안 굶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1736년(영조 12) 명정을 받게 되었다.

이연회의 손자인 이진성은 한산군수를 지냈고 목사 유명건(兪命健)의 딸 기계유씨와 결혼하였다. 아버지 이우춘(李宇春)이 병에 걸리자 이진성은 자신의 손가락을 끊고 피가 흐르게 하여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여 생명을 연장시켰다고 한다. 이후 이진성은 장사랑에 증직되었고 정려를 받았다.

전의이씨삼위효열정려는 원래 부여 은산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이연회의 8세손 이석호(李錫澔)[1880~1945]가 일본인에게 쫓겨 현재 전의이씨의 집성촌인 사곡면 대중리로 피신하게 되었는데 이때 명정 현판도 함께 옮겨 왔다. 이후 이동찬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힘을 모아 1997년 정려를 지금의 위치에 새로 세웠다.

[형태]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형의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앞면과 양쪽 좌·우는 홍살 처리가 되어 있고, 뒷면은 벽으로 되어 있다. 정려의 정면 위에는 ‘효열정려(孝烈旌閭)’라고 새겨진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 내 뒷면에는 ‘효자조산대부행사복시주부이연회지문영묘을해명정(孝子朝散大夫行司僕寺主簿李延會之門英廟乙亥命旌)’이라고 쓰인 효자 이연회의 명정 현판과 ‘절부조산대부행사복시주부이연회처영인청송심씨지문영묘병진명정열녀(節婦朝散大夫行司僕寺主簿李延會妻令人靑松沈氏之門英廟丙辰命旌)’라고 쓰인 열녀 청송심씨의 명정 현판이 있다. 또한 ‘효자장사랑헌릉참봉이진성지문경묘갑진명정(孝子將仕郞獻陵參奉李晉聖之門景廟甲辰命旌)’이라고 쓰인 효자 이진성의 명정 현판도 있다. 가운데에는 이연회의 9세손인 이호승(李虎承)[1908~?]의 효행비가 있다. 이호승은 아픈 아버지가 노루의 간을 먹고 싶다고 하자 이를 구하여 정성으로 모셨다. 그 후 공주향교에서 이호승을 효자로 표창하였다.

[현황]

대중리에는 지금도 전의이씨가 대를 이어 많이 살고 있어 후손들에 의해 정려가 잘 보호,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처음부터공주 지역에 정려가 세워졌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대중리에는 전의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현재까지 정려가 문중에서 관리 보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의이씨가 공주 지역에서 굳건한 기반을 다지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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