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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556
한자 三隱閣
영어음역 Sameungak
영어의미역 Shrine of Jeong Mongju, Gil Jae and Yi Saek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1로 462[학봉리 789]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고수연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84년 5월 17일연표보기 - 삼은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삼은각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 삭제
문화재 지정 일시 2024년 5월 17일 - 삼은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에서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
성격
건립시기/일시 조선 전기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동학사1로 462[학봉리 789]지도보기
소유자 사단법인 숭모회
관리자 사단법인 숭모회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위패를 모신 조선 전기의 제례 시설.

[개설]

1394년(태조 3)에 야은 길재(吉再)[1353~1419]는 동학사에서 제를 지낸 후 절 옆에 단을 쌓고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지냈다. 그 후 1399년(정종 1)에는 유방택이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와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넋을 기리는 제를 올렸다. 또한 1400년(정종 2)에 공주목사 이정간(李貞幹)이 각을 세웠으며, 길재가 죽자 후학들이 이를 추배하여 세 사람의 호에 ‘은(隱)’이 들어가는 것을 기려 ‘삼은각(三隱閣)’이라 하였다. 삼은각은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단종과 충신을 기리는 숙모전(肅慕殿), 신라의 충신 박제상을 기리는 동계사(東鷄祠)와 함께 동학삼사(東學三祠)’로 불린다.

[변천]

삼은각은 길재가 1394년(태조 3) 고려 태조의 원찰인 동학사에 와서 고려의 모든 왕에게 제사 지내고, 절 옆에 단을 쌓아 스승인 정몽주의 충혼을 부르는 위령제(慰靈祭)를 올린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1399년(정종 1) 유방택이 길재가 만든 단을 중수하고 이색의 혼을 기리는 제를 올렸다. 1400년(정종 2)에는 공주목사 이정간이 단의 터를 중수하였다. 1421년(세종 3)에는 유방택의 아들 유백순이 길재를 추가로 제향하여 그동안 배향했던정몽주, 이색과 함께 세 사람의 호를 따서 삼은단(三隱壇)이라 하였다. 그 후 세조초혼각이 건립되면서 삼은단삼은각으로 개칭하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란 때 신천영 등이 초혼각과 동학사를 방화하면서 삼은각도 불탔다. 1830년(순조 30)에는 동학서원이 세워져 삼상(三相), 육신(六臣), 계림백(鷄林伯)과 함께 삼은(三隱)을 제향하였다. 1916년에 비로소 불에 타 버린 삼은각 1칸이 재건되었다. 이어 1924년에는 삼은각에 고려 후기의 학자 도은 이숭인(李崇仁)과 죽헌 나계종(羅繼從) 등을 추배하여 6위의 위패를 모시게 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황]

반포면 학봉리 동학사 동편에 숙모전, 동계사(東鷄祠)와 함께 삼은각이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에서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12.05 [개설] 수정 <변경 전> 단을 쌓아 자신의 스승 포은 정몽주의 충혼을 불러 위령제를 올렸다. 그 후 1399년(정종 1)에는 유방택이 길재가 만든 단을 중수하고 목은 이색의 넋을 기리는 제를 올렸다. <변경 후> 단을 쌓고 고려 태조를 비롯한 충정왕, 공민왕의 초혼제를 지냈다. 그 후 1399년(정종 1)에는 유방택이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의 넋을 기리는 제를 올렸다.
이용자 의견
진***** 누가 봐도 조선시대 그것도 몇백년 지났다면 당연히 이색이나 정몽주의 제자는 없었을거고 누가봐도 길재의 제자들이 훈구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자 스승인 길재를 높이기 위해 홍보를 하고 선전하고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많들어진 허구임. 이색이나 정몽주를 높이기 위해 많들어진게 아니라 자기 스승인 길재를 높이기 위해 고려충신으로 내세운 것임.
  • 답변
  • 디지털공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01
진***** 절에서 스님 영월과 제단을 많들고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는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임. 절에서 스님과 제사를 지냈다는 황당한 사실과 스승 권근과 박분의 삼년상을 지낸 길재가 스승도 아닌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다는 허무맹란한 주장 그리고 길재가 죽은지 한참 후에 최초 기록이 전해진다는 점 길재 생전에 전혀 이런 기록이 없다는 점.
  • 답변
  • 디지털공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01
진***** 첫째 삼은각의 유래는 위조임. 우선 길재는 정몽주와 아무 상관이 없고 정몽주의 제사를 지내적이 없음. 길재는 스승 권근과 박분의 삼년상을 치루고 우왕과 부모님 삼년상을 치렀을 뿐임. 길재는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숭상한 아주 대표적인 사람임. 그래서 부모님 장례를 주문가례로 치렸고 유언도 주문가례의 장례를 치르라고 함.
  • 답변
  • 디지털공주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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