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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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州貴山里萬頃盧氏三義士生家址 |
영어의미역 | Birthplace of Three Patriots of Gwisan-ri in Gong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엄나무길 32[귀산리 9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박범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9년 12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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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공주귀산리만경노씨삼의사생가지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 삭제 |
성격 | 생가지 |
지정면적 | 5,111㎡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엄나무길 32[귀산리 92]![]() |
소유자 | 만경노씨 종중 |
관리자 | 만경노씨 종중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남도 기념물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에 있는 노응환·노응탁·노응호 3형제의 생가 터.
[개설]
노응환(盧應皖)[1555~1592], 노응탁(盧應晫)[1560~1592], 노응호(盧應皓)[1574~1592] 등은 본관이 만경이다. 이들은 노세득(盧世得)[1526~1589]의 아들로서 일찍이 공주목사였던 중봉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공부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이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 이들 삼 형제도 조헌의 의병에 합류하여 활약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헌(趙憲)의 의병부대에 합류한 삼 형제는 충청도와 전라도 탈환의 전기가 된 청주성 전투에 참전해 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군을 저지하기 위해 충청도 금산에서 왜군과 맞섰는데, 노응환, 노응탁은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조헌(趙憲) 및 칠백 의사와 함께 순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응호 역시 두 형과 함께 청주전투에 참전하였다. 군량을 모으기 위해 잠시 진영을 떠났다가 군량을 모아 금산으로 갔을 때는 이미 두 형을 비롯한 칠백의사가 모두 순절한 뒤였다. 노응호는 형들의 시신을 찾아와 고향에 안치하였다. 이들 3형제는 모두 공주의 삼의사(三義祠)와 금산의 종용사(從容祠), 보은의 후율사(後栗祠)에 제향되었다. 이들 삼형제의 충혼은 『중봉집(重峰集)』과 『항의신편(抗義新編)』 등에 자세하다. 특히 노응탁은 금산의 칠백의총 경역 내에 있는 ‘일군순의비(一軍殉義碑)’ 비문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노응환, 노응탁 형제는 금산전투 이후에도 여러 기록에 등장한다. 중봉 조헌의 문인록에는 노응환이 1655년(효종 6)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익(趙翊)의 『공산일기(公山日記)』에도 노응환·노응탁 형제가 그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노응탁이 문묘종사 논의나 표충사의 사액 등을 논의하는 데 참여했음이 나타난다. 이러한 기록 간의 괴리는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만경노씨 가문이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과의 단절을 입증하고, 새로운 충신 가문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과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변천]
삼의사의 충절은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이미 정려가 건립되었다. 노응환, 노응탁형제는 1831년(순조 31) 증직(贈職)과 함께 명정(銘旌)을 받아 이곳에 정려를 세웠다. 노응호는 1892년(고종 29)에 명정을 받아 우성면 반촌리에 정려를 건립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을 추모하고 제향할 사우가 없는 것을 공주의 유림과 후손들은 아쉽게 여겼다. 1978년 유림과 후손 80여 명이 연명으로 발의하여 노씨 삼의사 사우건립추진회를 조직하고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증을 받았다. 1979년 12월 19일 삼의사의 생가 터는 공주귀산리만경노씨삼의사생가지라는 이름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1981년 사우를 세우고 ‘삼의사(三義祠)’라고 현액하고, 1982년에 주변을 정화했다. 이때 우성면 반촌리에 있던 노응호의 정려를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공주귀산리만경노씨삼의사생가지는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공주귀산리만경노씨삼의사생가지는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에 있다. 공주시에서 정안면으로 가는 국도 23호선을 따라 2㎞ 정도 가다가 반촌교 직전에서 왼쪽 도로로 다시 3.5㎞ 정도 가면 귀산교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면 검바위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이 마을의 우측에 삼의사 사우가 있다. 충신 만경노씨 삼의사 정려는 사당 정면에 있으며, 이 일대가 만경노씨 삼의사의 생가 터이다.
[현황]
공주귀산리만경노씨삼의사생가지에 건립한 삼의사 사우는 충의문과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우 오른쪽으로 ‘삼의사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 삼의사(三義祠) 건립과 함께 복원된 것이다. 그 아래쪽에는 만경노씨 삼의사의 정려가 있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에 위치한 정려는 노응환, 노응탁의 정려로, 정·측면 1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익공 계통의 건물이나 익공 자체는 생략되어 있다. 8각 고주초석 위에 건물을 세웠다. 정려 앞쪽으로는 삼의사 사우 건립 연혁을 소개한 비석과 노응환의 신도비가 배치되어 있다.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에 위치한 정려는 노응호의 정려이며, 형태는 노응환·노응탁의 정려와 유사하다. 노응호 정려 뒤편에는 관리사가 위치해 있다. 삼의사 사우 옆으로 만경노씨대종중 회관이 들어섰으며, 종중에서 사우를 관리하고 있다. 회관 맞은 편에는 주차 공간이 조성되어 있으며, 작은 연못과 함께 감모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은 원래 모정이었다고 하며, 세 형제가 아버지인 노세득(盧世得)으로부터 강학을 받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 삼의사 건립과 함께 복원된 것이다. 그 아래쪽에는 만경노씨 삼의사의 정려가 위치하고 있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에 위치한 정려는 노응환·노응탁의 정려로, 정·측면 1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이며, 익공계통의 건물이나 익공 자체는 생략되어 있다. 8각 고주초석 위에 건물을 세웠다.
[의의와 평가]
공주시 우성면 귀산리는 만경노씨의 집성촌으로 그 주변의 동곡리와 반촌리까지 만경노씨들이 세거하고 있다. 삼의사의 생가 터를 중심으로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삼의사나 그 주변의 삼의사 정려, 비석, 상서류 등 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 당시 만경노씨들의 공주 지역에서의 향촌 세력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일 뿐만 아니라, 삼의사가 공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