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702 |
---|---|
한자 | 東萊鄭氏 |
영어의미역 | Dongrae J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 |
집필자 | 김병학 |
세거지 |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 |
---|---|
집성촌 |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동 |
입향시기/ 연도 | 1344~1350년경 |
성씨시조 | 정회문 |
입향시조 | 정인 |
[정의]
정회문을 시조로 하고, 정인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김제시 세거성씨.
[연원]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신라 유리왕 때 임금으로부터 정씨의 성을 받은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하였으나, 계대가 전해지지 않게 되어 후손 정지원(鄭之遠)을 1세로 하고 있다. 『을미보(乙未譜)』에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이었던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하여 기세하였으나, 『병신보(丙申譜)』 이후부터는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비가 발견된 이후 묘지문에 의해 그로부터 3세를 소급하여 정지원을 시조로 하여 기세하고 있다. 동래(東萊)는 옛날의 장산국(萇山國)인데, 신라가 정복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두었고, 경덕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입향경위]
김제에 입향한 동래정씨는 정인(鄭絪)으로, 호는 양헌(良獻)이다. 정인은 대호군으로 1356년(공민왕 5) 강릉 교주도도지휘사(交州道都指揮使司)로 동해안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와 함경도 국경에서 여진족이 쳐들어와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뛰어난 용병술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켜 왜구를 물리치고, 여진족을 격파하였다. 나이가 들자 벼슬을 그만두고 들 넓고 호수가 아름다운 벽골(碧骨)[현재의 김제시]에 낙향하여 정착하였다.
[현황]
정인의 빛나는 공적과 학덕이 본보기가 되어 김제 유림들이 김제시 흥사동에 승방서원을 세우고 배향하였다. 후손으로는 예조판서를 지낸 손자 정흥사(鄭興嗣), 홍문관직제학을 지낸 증손 정곤(鄭坤),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정수홍(鄭守弘), 우의정을 지낸 정언신(鄭彦信) 등이 있다. 부패한 왕권을 시정하려다 모반으로 몰려 아들과 함께 자결한 정여립(鄭汝立)도 정인의 8대손이다.
[관련유적]
김제시 흥사동 승반산(升盤山) 아래 정인을 비롯하여 정수홍·정곤·정임 등을 배향한 승방원(承芳院)이 있고, 김제시 장화동에 정윤교(鄭允喬)·정윤준(鄭允俊)·정윤검(鄭允儉) 등을 배향한 화동서원이 있다.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에 효자로 이름난 정존후(鄭存厚)의 정려(旌閭)와 열녀 전주이씨의 정려가 있으며, 김제시 장화동에는 효자 정윤교와 정지형(鄭志亨), 열녀 김제조씨(金堤趙氏)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정려가 있고, 청하면 월현리에는 효자 정석흥(鄭錫興)의 정려가 있다. 그밖에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독립유공 애국지사 정현섭(鄭賢燮) 사적비, 청하면 월현리에 독립유공애국지사 정병모(鄭秉謨) 사적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