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18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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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喪禮 |
이칭/별칭 | 상장례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집필자 | 정승모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에서 상을 당한 가족과 이웃 성원들이 갖추는 모든 상장(喪裝)과 의례와 그 절차.
[개설]
유교식 상·장례는 상을 당한 사람들의 슬픈 감정과 효(孝)의 관념 뿐 아니라 본종(本宗) 위주의 친족관계 등 유교에서 지향하는 사회질서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점은 특히 오복제도(五服制度)에 잘 나타나 있다. 상례 절차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흉(凶)의 상태에서 길(吉)의 상태로의 전환을 단계적으로 명시함으로써 가(家)의 질서회복과 사회로의 복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상·장례 방식은 각자의 내세관이나 집안의 종교적 성향에 따라 화장(火葬)과 매장(埋葬)으로 나눌 수 있으나 조선초기부터 매장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매장도 관을 함께 넣는가 또는 관을 빼고 시신만 넣는가에 따라 입관(入棺) 방식과 탈관(脫棺, 또는 退棺) 방식이 있다. 이 중 후자는 18세기 중반 이후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주로 유행하였는데, 시신이 빨리 육탈(肉脫), 즉 뼈만 남은 상태가 되는 것이 좋다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부령」으로 개인묘지보다는 공동묘지를 권장하였고 장사기간을 5일에서 14일 사이로 하고 상복을 입는 기간은 30일로 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나 실제로는 잘 시행되지 못했고 또 강제력도 갖지 못하였다. 1940년에는 「묘지규칙」을 개정하여 매장(埋葬)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어 화장(火葬)을 유도하였으며 매장 및 매장지에 대한 규제와 통제로 공동묘지 조성이 활발해졌다.
[절차]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상주(喪主)는 상장(喪杖)을 짚게 되는데 부상(父喪)인 경우 밑면이 둥근 지팡이를, 모상(母喪)에는 밑면이 네모난 지팡이를 사용한다. 임종(臨終)은 정침(正寢), 즉 안방에서 한다. 망자(亡者)의 상의(上衣)를 가지고 지붕 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복 복 복’이라고 소리를 내어 고복(皐復)하는 것은 죽은 자가 소생하기를 원한다는 상징적인 표현이며, 고복한 상의를 시신에 덮는 것도 같은 의미다.
머리를 다시 묶는 괄발(括髮)은 소렴(小斂) 후에 한다. 대렴(大斂)은 사망을 인정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대렴(大斂)이 끝나면 다음날 성복한다. 임종부터 발인하여 상여가 집을 나갈 때까지의 기간을 기준으로 양반 사대부들은 8일장, 서인들은 3일 내지 5일장을 하였다.
봉분(封墳)을 이루면 봉분제, 성분제(成墳祭), 또는 평토제(平土祭)를 갖는다. 그에 앞서 타성(他姓)에게 부탁하여 산신제를 지낸다. 삼년상의 경우 상중에 일곱 단계의 제사를 치른다. 우제·졸곡제·부제·소상·대상·담제·길제(虞祭·卒哭祭·祔祭·小祥·大祥·禫祭·吉祭)가 그것이다. 그 중에 소상, 대상 및 담제 때는 변복(變服), 제복(除服) 등으로 점차 길복(吉服)으로 나아간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상·장례와 관련된 마을조직으로 상계(喪契), 상포계(喪布契), 연반계[延燔契] 등의 계 조직이 있다.
부조를 지촉대(紙燭代)라고 한다. 실제로는 술, 쌀, 팥죽 한동이 등으로 부조한다. 부조가 들어온 양과 집안의 위세는 비례한다. 누가 무엇을 가져왔는지 부주끼, 즉 부조기(扶助記) 등 장부에 적어둔다. 부조하는 술을 병주라고 하는데, 1.4ℓ[8홉] 정종 병에 막걸리 1ℓ[한 되]를 담는다.
성복제 방식은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며느리 상옷, 즉 상복을 친정에서 보내오는 관례는 대개 같다. 거성옷, 거상 등으로도 부른다. 1970년대 이후로는 상주의 상복도 아무나 못하고 먼 데서 전문가를 불러 한다. 요즈음에는 이것도 장례식장에서 도맡아 한다.
천구(遷柩), 즉 관을 옮길 때 방문 앞에 엎어둔 바가지를 깨고 지나가는 것은 지금도 볼 수 있다. 상여가 있는 마을에서는 발인 전날 상여놀이를 하는 경우가 있다. 헛상여를 상두꾼이 메고 노는데 상여를 관리하는 상포계에서 주관한다. 이때 망자가 젊은 사람이면 젊은 사람들만 고깔을 쓰고 상여 위에서 춤추고 장구치고 놀며 넋을 위로한다.
장지까지 운구하면서 상여꾼들은 힘든 곳마다 쉬면서 상주가 아니라 ‘복재기’들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복재기는 건을 쓴 상주 친척들이나 사위다.
경기도가 그렇듯이 과거 이곳에서도 퇴관을 하고 관은 장지에서 태운다. 하관은 시각이나 방향을 지관이 일러준 대로 한다.
이 일대에도 반상관계가 있어서 그동안 상민들이 상여를 메주다가 일제강점기 때 상여 메는 일로 갈등이 벌어지자 반상구분 없이 서로 메주기로 합의하여 상조계나 연반계[延燔契]를 결성하였다. 상여는 대개 마을마다 있었다. 마을마다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이후 대부분 마을에서 계가 해체되었다.
이곳에서는 상가 음식으로 국을 끓일 때 토장을 넣지 않는다고 한다. 토장국이란 된장을 넣어 끓인 된장국이다. 토장을 넣어 국 끓이면 또 초상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장만 치고 무, 다시마, 북어 등을 넣어 멀겋게 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