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6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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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敎獻 |
이칭/별칭 | 김헌(金獻),백유(伯猷),무원(茂園),보화(普和)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우용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옛 경기도 광주] 출신의 독립 운동가이자 종교 지도자.
[가계]
김교헌은 본관이 경주(慶州),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당명은 보화(普和), 뒤에는 이름을 헌(獻)이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공조판서 창희(昌熙)이며, 어머니는 풍양 조씨로 판관을 지낸 희필(熙弼)의 딸이다. 대한제국 관립 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교관을 지낸 김교준(金敎準)은 그의 동생이다.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역삼리 55에서 출생하였고 1923년 11월 18일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였고, 1903년 『문헌비고(文獻備考)』 편집위원, 1906년 동래 감리 겸 부산항 재판소 판사, 동래부사, 1909년 규장각 부제학 겸 『국조보감』 감인위원 등을 지냈다.
독립협회에 관여하면서 계몽주의 사상과 근대적 민족의식에 눈을 떠 1904년에는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여 민족주의적 역사 인식을 고취하였으며, 1907년에는 비밀결사 신민회에도 관여하였다. 대종교가 중광(重光)될 때 교인이 되어 교(敎)의 역사를 정립하였다. 1916년 9월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였으며, 1917년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기고 교세 확장과 독립 정신 교육에 주력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대한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서명하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신단민사』, 『단기실기(檀記實記)』, 『홍암신형조천기(弘巖神兄朝天記)』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