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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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族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우용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에서 개항 이후 1945년 8.15 해방까지 근대 민족국가 수립, 국권 회복, 민족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개인적·집단적으로 벌인 저항운동과 실력양성운동 등의 총칭.
[개설]
한국 사회 내부에서는 조선 후기 이래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하면서 중세 국가의 틀을 깨고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1876년의 개항은 여기에 외세의 식민지화 압력으로부터 국가를 보존하고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과제를 추가로 제기하였다. 이후 한국에서는 근대 국가 수립운동과 반외세 운동이 다양한 주체에 의해, 다양한 형식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가치와 목표에서 상호 대립적이기도 했던 이들 운동을 통칭해서 민족운동이라 할 수 있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반외세 의식을 고취했던 위정척사운동과 이와는 반대로 외국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국내 정치와 사회의 적폐(積弊)를 해결하려 한 개화운동은 지배계층이 전개한 초기 민족운동의 두 원류(原流)였다. 이와는 별도로 농민 등 기층 민중도 외세의 침투에 반대하고 중세적 사회경제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던 바, 이 역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대략 1905년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민족적 과제가 근대 민족국가 수립에서 국권 회복, 또는 민족 독립으로 옮겨감에 따라 척사와 개화의 대립은 실질적인 의미를 잃었다. 그 대신 점진적인 실력양성운동을 통해 상황 변화에 대비한 내실을 갖출 것인가, 아니면 무력투쟁과 외교활동을 통해 상황 변화를 유도할 것인가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1920년대 이후에는 독립국가에 대한 지향을 둘러싸고 새로운 쟁점사항이 추가되었다. 러시아혁명 이후 전 세계로 확산된 사회주의 사상이 국내에도 유입되어 민족운동의 한 사조(思潮)로 자리 잡았다.
[강남구의 민족운동]
현재의 강남구 지역에 해당하는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대왕면 일대에서도 여러 가지 민족운동이 벌어졌다. 을사늑약 이후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이 지역에서도 여러 차례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 지역 출신으로 의병부대에 투신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경기 의병진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김하락(金河洛)을 필두로 이재윤(李載允), 김범이(金範伊), 신창룡(申昌龍), 신창현(申昌鉉), 정원집(鄭元執), 정홍준(鄭弘俊), 김봉기(金奉基), 황갑용(黃甲用), 김사근(金士根), 유태수(劉泰秀), 김순태(金順泰), 송금봉(宋今奉), 남공필(南公弼), 안옥희(安玉熙), 김인범(金仁凡), 박성삼(朴聖三), 안재학(安載學), 임백윤(任白允), 정영보(鄭永甫) 등이 의병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1907년 일본으로부터 얻은 차관을 갚아 일본의 국권 침탈에서 벗어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졌을 때에도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송현동 주민들은 의연금을 모아 황성신문사에 납부했다. 대왕면 출신의 이윤종(李胤鍾)과 이석종(李奭鍾)은 기호흥학회 등 실력양성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인 광주군 대왕면과 언주면에서도 이시종(李時鍾), 이재순(李載淳) 등의 주도 아래 만세시위, 주재소 습격 등의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3.1운동 이후에는 이정수(李廷秀), 이재인(李載仁) 등 국외 독립군 부대에 투신하거나 그와 연결하여 군자금 모집, 선전 활동 등을 담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광주군 대왕면과 언주면에도 청년회, 부녀회 등의 친목단체들이 다수 만들어졌는데, 이들 단체도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생활 문화를 개선하는 데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