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800056 |
---|---|
한자 | 楮子島 |
이칭/별칭 | 무동도(舞童島),압도(鴨島)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
집필자 | 소현수 |
제정 시기/일시 | 백제 시대 - 저자도 관련 문헌 |
---|---|
폐지 시기/일시 | 1970년대 - 한강개발사업 |
비정 지역 | 저자도 -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옥수동 사이 |
성격 | 섬 |
관련 문헌 | 『동국여지비고』|『여지도서(與地圖書)』|『조선왕조실록』|『협주기(峽舟記)』|『호당기(湖堂記)』|『경성부사(京城府史)』 |
[정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옥수동 사이에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만 전해지고 있는 한강의 섬.
[개설]
한강 본류가 선회하는 지점이어서 잔잔한 호수처럼 보인다는 서호(西湖)와 함께 동호(東湖)에는 지금은 사라진 저자도가 있었다. 동호 일대에는 왕실 소유의 정자들과 함께 독서당(讀書堂)·압구정 등 문인들의 정자가 많았다. 따라서 승경지였던 저자도에 시인 묵객(墨客)들의 방문이 잦았다. 저자도에 별서를 두고 풍류를 즐긴 인물과 그들이 남긴 문학작품은 상당수에 이른다. 가장 앞선 시기의 인물은 고려 후기의 정승 한종유(韓宗愈)[1287~1354]였다. 조선 전기 저자도는 태조의 이복형제인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1348~1408]의 소유였다. 이후 저자도는 세종 대에 왕실 소유로 바뀌어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고, 공주는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내려주었고, 안빈세는 섬을 얻은 것을 기념하여 화공에게 「저자도도(楮子島圖)」를 그리게 하였다. 조선 전기 저자도는 왕이 즐겨 찾던 유상지였으며,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저자도에서 양화도까지 선유(船遊)를 베풀었다. 또한 넓은 백사장을 가진 저자도는 기우제와 출정하는 병사들의 전송 행사를 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공식적 용도 외에도 김창흡은 저자도에 머물며 풍류를 즐기고 ‘현성(玄城)’이라는 정자를 짓기도 하였다. 저자도는 여주강으로 나가는 중요한 수로로써 조선 초기부터 왕실 소유의 섬이었고, 기우제를 올리는 장소였으며, 문사들의 별서(別墅)가 있었던 큰 규모의 섬이었다. 1970년대 한강 개발 사업으로 골재 채취가 이루어지면서 저자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명칭 유래]
예전에 강남구 청담동 강변에는 닥나무를 전문적으로 생산했었던 닥점이라는 자연촌락이 있었다. 닥나무 껍질은 한지의 원료인데, 근처 섬에도 역시 닥나무가 많아서 그 섬을 닥나무 저(楮)자를 따서 저자도라고 불렀다. 흔히 무동도(舞童島)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실제 무동도는 저자도 동쪽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그밖에 저자도를 압도(鴨島)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형성 및 변천]
저자도의 존재가 확인되는 시점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의 기록이지만, 『삼국사기』에 저자도와 백제 역사의 관계가 나온다. 온조가 낙랑을 공격할 때 아차산 아래를 지났다고 하므로, 아차산과 가까운 저자도에 주둔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협주기(峽舟記)』에 저자도에 백제 온조왕의 터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김창흡(金昌翕)[1653~1722]은 만영(漫詠) 제14수에서 저자도와 백제의 역사를 연계시켰다. 약 400여 년 전 저자도는 모래벌로 된 평지와 바위를 포함한 둔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홍수가 나거나 갈수기에 따른 지형 변화로 인해서 한시적으로 강남의 모래벌과 연결되기도 했다. 저자도의 규모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동서 2㎞, 남북 885m의 폭에 넓이가 118만㎡에 이르렀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는 봉긋한 등성이와 넓은 밭과 집들이 있는 섬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서 저자도의 모양이 바뀌었으며, 1963년부터 뚝섬 제방공사를 하면서 저자도의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저자도와 압구정동 사이의 한강 매립공사 결과 저자도의 대부분이 가라앉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동국여지비고』에는 저자도가 도성 동쪽 25리, 삼전도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옥수동 사이에 위치했던 저자도는 중랑천과 한강 본류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압구정을 감아 도는 물줄기가 중랑천과 만나면서 모래와 흙을 퇴적시켜 생겨난 섬이 저자도이다.
[관련 기록]
1757년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경기도, 광주조에는 저자도에 약 20여 명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61년(세조 7) 저자도의 얼음을 갈무리했으며, 1550년(명조 5) 윤 6월에는 큰 비로 인해 경기도 광주군의 삼전도(三田渡)와 저자도 등지의 민가 10여 가구가 허물어지고 100여 가구가 물에 잠긴 기록이 있다. 또한 1663년(현종 5) 1월에는 사노(私奴)가 동네 사람[世玄]과 다투다가 칼로 찔러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무렵부터 십 여 가구 이상의 민가가 저자도에 마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41년 발간된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현재 이 섬의 총면적은 36만 평이며 그중 민간 소유지는 넓이 8만 6,000평으로 약간 잡초가 나있을 정도이고 그 밖의 땅은 모두 평탄한 모래벌이다’라고 기록되었다.
「경성도」[1922]와 「서울특별시가도」[1949], 그리고 6.25전쟁 후 제작된 「서울도시계획가로망도」[1953]·「새서울도로·지번개량지구약도」[1968]·「신편서울특별시개발제한구역도」[1975] 등은 저자도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지도들이다.
윤진영은 16세기 작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계회도(契會圖)」·18세기 정선의 「압구정도」·19세기 작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 등을 토대로 조선 시대의 저자도와 그 주변 경관을 유추하였다. 이밖에도 저자도와 관련된 다수의 기록이 『한강의 섬』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