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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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璟奎 |
영어공식명칭 | Jo Gyeonggy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소포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은제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조경규(趙璟奎)[1876~1950]는 1876년 6월 1일 함안군 군북면 소포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군북의 유림은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3월 중순 조용대(趙鏞大)의 사랑채에 모여 의거를 계획하였다. 당시 모의에는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3월 20일 군북 장날에 시위를 결행하기로 약속하였다. 당시 조경규는 함안군 군북면 오곡리·덕대리·중암리에서 시위 군중을 모으는 일을 맡았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3월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에 있던 신창 야학교의 학생 50여 명이 시작하였다. 오후 1시경 시위대가 3,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조상규가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대는 만세 삼창으로 화답하였다. 이에 군북 경찰 주재소 경찰과 마산에서 파견된 포병 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오후 5시즈음 시위대가 5,000여 명으로 늘어나 경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였고 이에 시위대는 분노하여 돌을 던지며 대항하였다. 일본 경찰은 결국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하여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고 18명이 부상당하였다. 조경규는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은 채 피신하였다가 의령의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평생 장애의 몸으로 살아야 하였다. 기존에는 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하였는데, 실제로는 1950년 7월 26일까지 생존하다가 74세로 작고하였다. 조경규는 1남 3녀를 두었고, 아들은 조용경(趙鏞慶)이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