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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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正來 |
영어공식명칭 | Jo Jeongrae |
이칭/별칭 | 형진(亨進),화헌(和軒)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경아 |
[정의]
근대 함안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형진(亨進), 호는 화헌(和軒). 대소헌(大笑軒)조종도(趙宗道)의 13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방규(趙邦奎)이고, 할아버지는 파서(巴西)조용진(趙鏞振)이다. 아버지는 성와(誠窩)조형제(趙瑩濟)이며, 어머니는 이형모(李馨模)의 딸 재령 이씨(載寧李氏)이다. 부인은 이현기(李鉉基)의 딸 재령 이씨로, 아들은 조현한(趙顯漢)·조현문(趙顯文)·조현돈(趙顯惇)이고, 사위는 성봉조(成鳳祚)이다.
[활동 사항]
조정래(趙正來)[1880~1945]는 함안군 안도리[현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덕대리]에서 태어났다. 가야읍에 있는 인산재(仁山齋)에서 친척인 조정규(趙貞奎)에게 배웠다. 또한 이종기(李種杞)의 제자 김병린(金柄璘)에게도 수학하였다. 함안군 안의면 심원리(深源里)에 은구재(隱求齋)를 지어 강학 활동을 하였다.
1914년 조정규가 요동으로 갔을 때 조정래도 따라가 이승희(李承熙)를 만났다. 1915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패망을 기대하며 요동에 갔으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1919년 고종(高宗)의 장례를 치르며 만국 평화 회의(萬國平和會議) 소식을 듣고는 동지들을 모아 독립 운동을 하기 위해 요동으로 갔으나 좌절하고 돌아와 경상남도 창원(昌原) 도곡(道谷)에 은거하였다. 부모의 상이 끝난 뒤에는 군북면 모계(慕溪)·범곡(帆谷)·지곡(芝谷)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만년에는 방어산(防禦山)에 중산정(中山亭)을 지어 동지들과 은거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6권 2책의 『화헌 문집(和軒文集)』이 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도리 학곡(學谷)[배움실] 선영 곤좌(坤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