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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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炯奎 |
영어공식명칭 | Jo Hyeonggyu |
이칭/별칭 | 경중(景中),은계(隱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고은영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함안 지역에서는 서울3·1 운동 이후 독립 시위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주도하여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과 3월 20일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이 거행되었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조석규(趙碩奎)·조상규(趙相奎)·조형규·이재형(李在衡) 등이 계획하였다.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하고 인근 지역에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3월 20일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의 신창 야학교에서 시작되어 군북 장터로 퍼져 나갔다.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현지 경찰과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들이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군중은 5,000여 명으로 늘어나 경찰 주재소로 나아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시위대에 공포를 발사하고, 나아가 조준 사격을 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군중이 무참히 구타당하고 체포되었다.
[가계]
조형규(趙炯奎)[1883~1940]는 자는 경중(景中)이고, 호는 은계(隱溪)이다. 아들은 조용대(趙鏞大), 조용현(趙鏞玄), 조용희(趙鏞禧), 조용쌍(趙鏞雙)이 있다. 손자는 조현제(趙現濟), 조필제(趙弼濟), 조진제(趙珍濟), 조흥제(趙興濟), 조양제(趙亮濟), 조정제(趙正濟), 조홍제(趙洪濟), 조우제(趙禹濟), 조의제(趙義濟), 조승제(趙昇濟)가 있다. 종손자는 조성래(趙星來), 조영래(趙映來)가 있다. 독립운동가인 조석규(趙碩奎)는 형이고, 조주규(趙周奎)는 사촌 형이다.
[활동 사항]
조형규는 1883년 12월 28일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형들인 조석규, 조주규와 같이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래고 있었다. 서울 독립 시위 소식을 전해 들은 함안 지역 애국 지사들은 3월 19일 함안 장날과 20일 군북 장날에 의거하기로 모의하였다. 조형규는 모의에 가담하여 태극기 제작과 동지들 간의 연락책을 맡았다.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 때 태평루에서 개최된 독립 선언식에 참여하고, 식민 통치의 하수 기관인 경찰 주재소 등을 습격하였다. 3월 20일 태극기와 독립 선언 전단을 군북 냇가로 가져 가서 군중에게 나눠 주었다. 오후 1시경 3,000여 군중이 모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오후 5시경 경찰서 주재소에 이르니 군중이 5,000여 명에 다달았다. 이들은 일본 군경의 공포에 맞서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향하여 주모자를 골라 흉탄을 발사하였고, 이 과정에서 조형규는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어 신음하던 중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2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출소 후 왼쪽 어깨뼈가 부서져서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서산정에서 만세계(萬歲契)를 조직하여 군북 시장 만세 운동에서 순절한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는 제향과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조형규는 1940년 8월 20일 광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묘소]
묘소는 함안군 가야읍 사내리 백산 무성곡에 있다.
[상훈과 추모]
조형규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이 인정되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