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200850
한자 趙碩奎
영어공식명칭 Jo Seokgyu
이칭/별칭 정중(定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고은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 5월 14일연표보기 - 조석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석규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24년 4월 22일연표보기 - 조석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 - 조석규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조석규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20일 - 조석규 군북 시장 만세 운동 주도
출생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거주|이주지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
묘소 조석규 묘소 -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군북 시장 만세 운동은 조석규(趙碩奎)·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李在衡) 등이 계획하였다.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하고 인근 지역에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시위는 3월 20일 오전 9시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신창 야학교에서 시작되어 군북 장터로 퍼져 나갔다.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자, 현지 경찰과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들이 공포를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군중은 5,000여 명으로 늘어나 경찰 주재소로 나아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시위대에 공포를 발사하고 조준 사격을 하면서 현장에서 21명이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군중이 무참히 구타당하고 체포되었다.

[가계]

조석규(趙碩奎)[1884~1924]는 자는 정중(定中)이다. 아들은 조용기(趙鏞寄)·조용만(趙鏞萬)·조용삼(趙鏞三)이 있다. 손자는 조선제(趙渲濟)·조옥제(趙沃濟)·조순제(趙淳濟)·조균제(趙均濟)·조광제(趙珖濟)·조태제(趙兌濟)·조병제(趙丙濟)·조원제(趙元濟)·조의제(趙義濟), 증손자로는 조윤래·조인래·조양래·조용완·조욱래·조치효·조일래·조명래가 있다.

[활동 사항]

조석규는 1884년 5월 14일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30대부터 서산 서당에서 훈장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서울의 독립 선언 시위 소식을 듣고 사촌 형 조주규(趙周奎), 친동생 조석규, 재종 동생 조창규(趙昌奎) 등과 거사에 동참하기로 결의하였다. 조석규는 3월 6일경 조용대(趙鏞大)의 사랑채에서 20여 명의 지역 유지와 대책을 논의하였다. 3월 10일 10여 명의 동지들이 2차 회합을 하고 3월 20일 군북 장날에 의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조상규와 함께 의거 계획을 수립하고 총괄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3월 20일 오전 9시 신창 야학교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군북 시장으로 가서 군중 동원을 점검하였다. 시위에 동참한 군중이 많아 군북 냇가로 시위 장소를 변경하였다. 오후 1시경 3,000여 군중이 모여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오후 5시경 주재소에 이르렀을 때 군중이 5,000여 명에 다달았고 일본 군경의 공포를 맞서 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향하여 주모자를 조준하여 흉탄을 발사하였다. 이때 조석규는 주모자로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잔혹한 고문 여독으로 장애의 몸이 되어 고통당하다가 1924년 4월 22일 작고하였다.

[묘소]

조석규의 묘소는 함안군 가야읍 백새무성곡 재실 뒤편 갑자에 조성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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