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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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石器 時代 |
영어공식명칭 | Neolithic age |
이칭/별칭 | 빗살무늬 토기 시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선사/석기 |
집필자 | 임학종 |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가 끝나는 시기부터 청동기 시대가 시작하는 기간까지 토기와 간 돌 석기를 사용하던 시기.
[개설]
신석기 시대란 구석기 시대가 끝나는 약 1만 년 전부터 청동기 시대가 시작하는 기원전 1000년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지금부터 1만 년 전쯤부터 지구의 기후는 따뜻해져 현재와 비슷하게 되었다. 이를 후빙기[Holocene]라고 한다.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던 구석기 시대와 달리, 사람들이 일정한 곳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새로이 토기를 만들고 간 돌 석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시기이다. 초기 신석기 시대에는 여전히 사냥과 물고기잡이, 그리고 채집에 의존하였지만 중기 신석기 시대 이후가 되면서 점차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모두 같은 문화 단계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중동 지역이 가장 먼저 신석기 시대로 접어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학자 고든 차일드[Vere Gordon Childe]는 수렵과 채집으로 자연을 약탈만 하던 구석기 시대에 비해, 자연을 이용하여 생산을 하는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고 하여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늦어도 기원전 6000년경에는 시작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제주 고산리 유적(濟州高山里遺蹟)에서는 그보다 이른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지금부터 1만 년 전에는 우리나라도 신석기 시대로 접어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전국적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알려진 유적만 하여도 150곳이 넘는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물과 식량 자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큰 강변이나 바닷가, 가까운 도서 지역에서 땅을 파고 움집을 만들어 모여 살았다.
톰센(C. J. Thomsen)이 나눈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의 삼 시대 중 석기 시대를 러복(J. Lubbock)이 다시 깬돌 석기를 사용하는 구석기 시대와 간 돌 석기를 주로 사용하는 신석기 시대로 나누었다. 신석기 시대는 동물의 가축화와 작물의 재배화가 이루어지고 토기와 간 돌 석기가 사용되는 시기로 정의되지만, 각 요소의 출현 시기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는 간 돌 석기와 토기가 먼저 사용되고 농경이 다소 늦다는 동북아시아 전체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또한 서북 지역과 동북 지역, 동해안 지역, 서해 중부 지역, 남부 내륙 지역, 남해안 지역 등 지역에 따른 문화 발달상의 차이가 있기도 하다. 독특한 토기와 구석기 전통이 남아 있는 석기가 출토되는 제주도 고산리 문화는 1만 년 전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기원전 6000년 전까지의 기간을 신석기 시대 초창기로 하여 조기[기원전 6000~4500년], 전기[기원전 4500~3500년], 중기[기원전 3500~2700년], 후기·만기[기원전 2700~1000년]의 5단계 발전 단계를 거쳤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황]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서 확인된 신석기 시대 유적은 가야읍 도항리 유적과 군북면 동촌리 유적 등 두 곳이다. 도항리 유적은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106번지 일대 함안 말이산 고분군(咸安末伊山古墳群)의 북쪽 평지에 위치한다. 함안천을 따라 일제 강점기에 축조되었던 인공 제방의 바깥쪽이다. 유구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지만 눌러 그은[압인문]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다. 토기의 문양은 세침선문(細針線文)과 세단선문(細單線文), 단사선문(單斜線文) 등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의 신석기 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영선동식 토기' 양식이다. 유적의 형성 시기는 기원전 4000년 전후로 추정되며, 남강 유역권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시대 유적으로 의미가 있다.
동촌리 유적은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782번지 일원으로 남강으로 흘러드는 석교천 변의 곡간 충적지에 해당한다. 5점의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지표에서 수습되었지만 관련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토기는 모두 도항리 유적의 예와 동일한 신석기 시대 전기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