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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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墳[達城郡] |
영어공식명칭 | Tumulu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재환 |
[정의]
삼국 시대에 조영된 달성 지역의 무덤.
[개설]
고분(古墳)은 일반적으로 지하 또는 지상에 매장 시설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 흙을 높이 쌓아 올려서 만든 오래된 무덤을 통칭한다. 사람의 죽음이 그 신분에 따라 졸(卒)·사(死)·훙(薨)·붕(崩)으로 나누어지듯이 그 주검이 묻힌 무덤도 묘(墓)·분(墳)·총(塚)·능(陵) 등으로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다. 묘는 봉분이 없는 일반적인 무덤, 분·총·능은 흙을 높게 쌓아 올린 무덤으로 고총(高塚)의 의미를 가지며, 이 중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이다. 우리나라의 고분은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이 병존하고 있던 삼국 시대에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을 일컫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사 시대와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무덤을 고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원삼국 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여러 형태의 무덤이나 화장묘 등 통일 신라·발해 이후의 무덤들에 대해서는, 여러 왕이나 왕후들의 무덤으로 밝혀진 것은 왕릉이고 그외의 무덤은 묘이다. 고분은 당대의 매장 의례 행위의 물질적 증거로써 묻힌 사람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기념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분 속에 담긴 문화는 당시의 경관을 비롯하여 해당 세력 또는 국가의 문화적 양상, 교류 관계, 피장자 개인에 이르는 여러 정보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달성의 고분 떼는 대부분 넓은 평야와 강을 낀 구릉에 축조되었다. 과거 주된 생업 경제인 농경으로 인해 마을이 주로 하안 대지(河岸臺地)에 위치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달성의 고분 떼들은 당시 삼국 시대 사람들의 마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주변으로는 성곽들이 확인되고 있다. 고분 떼와 평지, 수원(水原), 성곽의 조합 양상을 보이는 유적들은 '문산리 고분 떼-문산리 산성(汶山里山城)-문산들-낙동강', '죽곡리 고분 떼-죽곡리 산성(竹谷里山城)-강정들-낙동강', '성산리 고분 떼-화원 토성–한밭들–낙동강', '설화리 고분 떼-설화리 산성(舌化里山城)-한밭들-명곡천', '성하리 고분 떼-성하리 서산성(城下里西山城)-붐더들-낙동강', '양리 고분 떼-초곡산성(草谷山城)-고래들-음동천' 등이 있다.
[발굴 조사 및 결과]
달성 지역의 고분은 널무덤[木棺墓]→덧널무덤[木槨墓]→돌덧널무덤[石槨墓]→돌방무덤[石室墓]이라는 진한·변한에서 신라·가야에 이르는 영남 지역 고분의 변천과 그 궤를 같이한다. 발굴 조사 자료를 중심으로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널무덤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 중엽의 늦은 시기의 무덤이다. 대구 테크노폴리스 부지 제4구역[달성군 유가읍 쌍계리]에서 14기, 달성 종합 스포츠 파크 부지[현풍읍 성하리]에서 3기가 발굴되었다. 판재식과 통나무식이 있는데, 판재식은 무덤구덩이를 파고 바닥을 정지하였으며 '井' 모양의 나무널 흔적이 남는다. 통나무널은 바닥에 쐐기공이나 굄돌 등 목관을 지지하기 위한 시설이 확인된다. 이 밖에 유물을 부장하는 벽감(壁龕), 요갱(腰坑)이 확인되었다. 충전토 내부와 상면, 나무널 윗면, 나무널 내부 등에 유물이 부장된다. 널의 크기는 최소 116㎝x22㎝, 최대 224㎝x83㎝이다. 널무덤 출토 유물은 주머니 토기, 검은 간 토기, 긴 목 항아리, 굽다리 접시, 타날 무늬 항아리 등의 토기류와 철제 창과 검, 도끼, 낫, 손칼, 청동제 동검 손잡이 등의 금속기가 있다.
2. 덧널무덤
2세기 후엽~4세기 대의 무덤이다. 달성군 다사읍 문양리 고분 떼에서 25기, 대구 테크노폴리스 부지 제4구역에서 1기가 발굴되었고, 화원 동산 내 시굴 조사에서는 1기의 윤곽이 확인되었다. 문양리 고분 떼 덧널무덤의 평면 형태는 긴네모꼴[長方形]이다. 나무 덧널과 무덤구덩이 사이의 뒷채움 방식은 흙으로 채운 것과 깬돌을 섞어 넣은 것이 있다. 대부분 단곽식(單槨式)이며 길이는 2m~4m 정도인데, 대형분인 7호분만이 으뜸 덧널과 딸린덧널을 '日' 자형으로 배치한 주·부곽식(主副槨式)이며 나무 덧널의 크기는 으뜸 덧널은 455㎝x100㎝, 딸린덧널은 140㎝x113㎝이다. 덧널무덤에서는 화로형 토기와 컵형 토기, 굽다리 접시, 두 귀 달린 짧은 목 항아리, 노끈 무늬 짧은 목 항아리 등 고식 도질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함안 지역과 김해 지역에서 제작된 토기들도 일부 출토되었다.
3. 돌덧널무덤
5세기 전반에 외관상 대형의 봉토를 가진 고분 즉 고총이 조영되기 시작하였는데, 내부 구조는 깬돌이나 강돌을 이용하여 쌓은 구덩식[竪穴式]이고 평면 형태는 긴네모꼴이다. 달성군의 대표적 고총 고분 떼는 문산리 고분 떼, 죽곡리 고분 떼, 성산리 고분 떼, 양리 고분 떼이다. 문산리 고분 떼와 죽곡리 고분 떼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부분 발굴되었으며, 성산리 고분 떼는 1호분 1기만 발굴되었다. 내부 구조는 모두 평면 형태가 긴네모꼴인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며 단곽식 또는 주·부곽식이다. 주·부곽식의 평면 배치는 으뜸 덧널과 딸린덧널을 나란히 배치한 11자형이 일반적이지만 'ㅏ' 자형으로 배치한 것[성산리 고분 떼 1호분]이나 양쪽 단벽 아래에 부장 공간을 설치한 것[문산리 고분 떼 Ⅱ지구 M2-2호]도 있다. 돌덧널무덤에서는 신라식 위세품과 철로 만든 갑옷 등과 함께 다량의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성산리 고분 떼 1호분에서 은제 관식, 금귀걸이, 은제 허리띠 장식, 큰칼이 출토되었고, 문산리 고분 떼 Ⅰ지구 3-1호·3-4호에서는 출자형 금동관이, 문산리 고분 떼 Ⅰ지구 4-1호에서는 은제 관식과 은제 투조 과대 등이 출토되었다.
4. 돌방무덤
앞트기식[橫口式]과 굴식[橫穴式]으로 구분된다. 달성군에서 돌방무덤은 6세기 이른 시기부터 앞트기식이, 6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굴식이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달성 종합 스포츠 파크 부지에서 발굴 조사된 성하리 고분 떼 제1호분이 앞트기식 초기 형태이다. 봉분은 원형이며 지름은 21m, 높이는 4.5m이다. 돌방은 길이 6.15m, 너비 1.33m의 긴네모꼴이다. 벽석은 깬돌과 강돌을 섞어 쌓았으며 바닥과 벽면 4개소에 횡목(橫木)과 목주(木柱) 흔적이 남아 있다. 벽석 뒤쪽으로 돌을 돌려 보강하였다. 남쪽으로 난 입구부에는 길이 3.4m, 너비 1.5m~5m의 돌방 진입 통로가 있는데 깬돌과 강돌로 쌓은 뒤 점토로 메웠다. 창녕 교동 고분 떼의 앞트기식 돌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굴식 돌방무덤은 달성군 화원읍의 설화리 고분 떼에서 가장 많이 발굴되었다. 돌방은 네모꼴[方形]이며, 4벽은 수직으로 올라가다가 천장 아래에서 안으로 경사지고 판상석 2~3매로 천장석을 덮은 궁륭(穹窿) 모양이다. 널길 위에 이맛돌과 벽체가 설치되었다. 시신 안치대는 제단 모양이며, 평면 형태는 'ㄱ' 자식 또는 안벽에 길이 방향으로 설치하고 증설하는 형태이다. 널길은 중앙부·좌우 치우친 형태 모두 있다. 관못의 사용에서 나무널에 시신을 넣어 안치한 것도 확인되지만 시신을 직접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쌍계리 고분 떼나 성하리 고분 떼의 굴식 돌방의 구조가 설화리 고분 떼와 다른 점은 돌방과 널길 천장 면이 높이 차가 없다는 것이다. 쌍계리 고분 떼와 성하리 고분 떼의 굴식 돌방은 앞트기식 돌방에 굴식 돌방과 같이 널길을 덧붙인 모양이다. 또 관고리·관못·관재 결속구, 관고리·관못·꺾쇠, 여러 개의 관고리 등 들어 나르는 나무널 사용이 폭넓게 확인되는 것은 시신의 직접 안치가 주류를 이루는 설화리 고분 떼 등과 또 다른 점이다. 돌방무덤 출토 유물의 양상을 살펴보면, 초현기의 앞트기식에서는 돌덧널 단계처럼 많은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지만 굴식에서는 소량의 토기를 제외하면 금귀걸이, 허리띠 장식, 관못·관고리 정도뿐으로 부장 유물의 수가 급격히 감소된다.
[의의와 평가]
육로와 수로를 통해 창녕~고령~대구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달성 지역에는 유가읍 양리 고분 떼나 화원읍 성산리 고분 떼, 다사읍 문산리 고분 떼 등의 고총 고분 떼와 함께 수많은 성곽이 축조되어 있다. 이로 볼 때 달성 지역은 삼국 항쟁 이전에는 낙동강 수계를 중심으로 하는 각국 교류의 중심적 거점으로 기능하였고, 이후 고구려의 공략과 대가야의 성장으로 인해 신라의 서쪽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달성 지역의 역할이 증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고총 고분에 대한 발굴 조사가 미미하여 그 구체적인 양상을 알지 못하며 연구도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향후 양리 고분 떼나 성산리 고분 떼 등 주요 고총 등에 대한 계획적 발굴 조사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