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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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四隱亭重修記 |
영어음역 | Saeunjeong Jungsugi |
영어의미역 | The Record of Renovation of Saeunje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순석 |
[정의]
조선 후기 이용구가 사은정의 중수를 기념하여 지은 기문.
[개설]
「사은정 중수기(四隱亭 重修記)」는 조국형(趙國衡)과 이인규(李麟珪)가 사은정(四隱亭)을 중수한 뒤에, 작자인 이용구(李容九)에게 중수기를 부탁하자 지어 준 기문(記文)이다. 글씨는 정영소(鄭榮韶)가 썼으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있는 사은정(四隱亭)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사은정은 정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하여 중종 때의 유학자로 식견이 높았던 조광보(趙光輔)와 조광좌(趙光佐), 이자(李耔) 등 사현이 장수 강학하던 정자이다. 이곳을 사은이라 한 것은, "은거하면서 농사짓고, 나무하고, 고기를 낚고, 약초를 캐는 네 가지 즐거움의 뜻을 취한다"는 의미이다.
[내용]
"사은정의 연혁과 함께 조광조, 조광보, 조광좌, 이자 선생의 학덕과 의리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서울의 남쪽 구성면 두암 위에는 예부터 정자가 있었으므로, 지금 새로 지으면서도 편액은 옛날 그대로 사은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전하여 말하기를, “정자를 세우는 이유는 산수가 아름답기 때문에 짓는 것이며, 인물의 번성함으로 이름 붙인다.” 하였는데, 이 정자를 은(隱)이라 함에 일은(一隱)이라 하여도 가할 것을 어찌 사은(四隱)이라 하였는가.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 정암(靜岩) 조 선생과 당질 방은(方隱), 회곡(晦谷) 중계공(仲季公) 및 음애(陰涯) 이공이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네 분은 도의로써 계를 맺고 은거하여 그 뜻을 구하고자 경(耕)·장(莊)·조(釣)·채(菜) 네 가지 낙을 취하여 여기에 정자를 짓고 이름붙인 것이다. 정자 근처에는 선현의 묘소가 있고 전원의 취미를 깃들일 수 있었다.’ 하였다.……
뒤에 화를 당하여 정자 역시 폐해지고, 네 분이 서로 화답하여 지은 글과 서찰도 없어져 전하는 것이 없었다. 오직 음애공이 조수재(趙秀才)에게 보낸 글이 남아 있을 뿐인데, 같이 은거하고자 한 뜻이 나타나 있다. 네 집안의 후손들이 그 뜻을 흠모하여 이 정자를 중건하고, 상서 민종현(閔鍾顯)이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 같은 일이 있은 지도 근 백여 년이 되었으니, 이번 중수함에도 기를 적을 만하리.……
갑자년 봄에 네 현인의 유손이 함께 꾀하여 자금을 내어서 옛 정자를 지음에, 조 문정공의 사당과 묘소가 또한 같은 군에 있으니 그 흠모함은 더욱 더하리라. 조국형(趙國衡), 이인규(李麟珪)가 그 일을 주도하고, 병인년 봄에 일을 마치었다. 모두 네 칸으로 전답이 두어 경이고, 옛날과 같게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사은정이다. 훗날 이 정자를 오르는 사람은 마땅히 옛 선현들이 여기서 행한 의례를 본받을진저."
[의의와 평가]
「사은정 중수기」에 따르면, 사은정은 정암 조광조 선생이 은거하면서 처음 지었던 정자가 퇴락하자 민종현이 중창하였으며, 다시 백여 년 뒤에 중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사은정기(四隱亭記)」, 「중수사은정기(重修四隱亭記)」와 함께 사은정의 자취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