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1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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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啓禧 |
영어음역 | Hong Gyehui |
이칭/별칭 | 순보,담와,문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일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장리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보(純甫), 호는 담와(淡窩). 아버지는 참판 홍우전(洪禹傳)이며, 어머니는 대사헌(大司憲) 이상(李翔)의 딸이다.
[활동사항]
담와(淡窩) 홍계희(洪啓禧)[1703~1771]는 영조 대에 활동한 문신으로 시무에 밝고 경세치용(經世致用)에 관심이 많았던 개혁 실천주의자이다. 스스로 노론 이재(李縡)의 문인이라 했으나 대다수의 이재 문인으로부터 배척당하였다.
한때는 조현명(趙顯命) 등 탕평파에 접근하여 출세하였으나 후일에는 영의정 김상로(金尙魯), 형조판서(刑曹判書) 윤급(尹汲), 참판(參判) 이기경(李基敬) 등과 한무리가 되어 영조 계비의 아버지 김한구(金漢耈)와 내통하는 등 권력을 좇아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소인·간신으로 지목되었다.
1737년(영조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정언(正言)이 되었고 우의정 조현명의 천거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수찬(修撰)을 거쳐 1742년(영조 18)에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가 되었으며, 이듬해 별견어사(別遣御使)가 되어 북로의 지형과 물정을 상세히 수록한 지도를 작성하여 영조의 인정을 받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추천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었으며, 1743년(영조 19) 부사과(副司果)로 있으면서 함경감사 박문수(朴文秀)의 부정 혐의를 탄핵하였다가 당색으로 공격받아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승지(承旨)로 특채되었다.
1747년(영조 23)에는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유생을 거재(居齋)시키지 않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일본 막부의 장군 도쿠가와[德川家重]의 승습(承襲)을 축하하기 위해 통신사가 되어 다녀왔다.
1749년(영조 25)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발탁되었으며, 영의정 조현명과 함께 균역법 제정을 주관하여 「균역사목(均役事目)」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균역법에 대한 비판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물러났으며,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되었다.
1754년(영조 30)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이후 형조판서·병조판서(兵曹判書)·호조판서(戶曹判書) 및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하였다. 1762년(영조 38)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잘못을 고변하여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정조 즉위 후, 두 손자가 정조 시해미수 사건에 가담하여 두 아들 및 일가가 처형당하게 되어 관직이 추탈되고 역안(逆案)에 이름이 올랐다. 또한 이재의 뇌암서재(雷巖書齋)에 배향하자는 충청도 유생의 논의가 있었으나 이재 문인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
유학자로 자처했으나 실무에 밝은 개혁 실천주의자로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삼운성휘(三韻聲彙)』가 있으며, 편서로 『준천사실(濬川事實)』, 『주문공선생행궁편전주차(朱文公先生行宮便殿奏箚)』, 『문산선생상전(文山先生詳傳)』, 『균역사실(均役事實)』, 『경세지장(經世指掌)』, 『사곡록(寺谷錄)』, 『창상록(滄桑錄)』,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일산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