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08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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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馨遠 |
영어음역 | RYu Hyeongwon |
이칭/별칭 | 덕부(德夫),반계(磻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재광 |
[정의]
조선 중기의 실학자.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덕부(德夫), 호는 반계(磻溪)다. 증조부는 현령 류위(柳湋), 할아버지는 정랑 류성민(柳成民), 아버지는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었던 류흠(柳흠)이다. 어머니는 참찬 이지완(李志完)의 딸이다. 부인은 심수경(沈守慶)의 증손녀이며, 부사 심은(沈誾)의 딸이다.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활동사항]
한성 외가에서 출생하였고, 2세 때에 아버지를 잃었다. 5세 무렵부터 글을 배워 문장이 뛰어났으나 조부의 뜻을 따라 한 번의 과거를 치러 진사가 되었을 뿐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653년(효종 4) 부안현 우반동(愚磻洞)에 정착하였다.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수차 전국을 유람하였다.
1665년, 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구휼(救恤)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5척과 마필(馬匹) 등을 비치하여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였다.
[학문과 사상]
학문은 성리학·역사·지리·병법·음운(音韻)·선술(仙術)·문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졌다. 당시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피폐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처방이 필요하였다. 이에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개편을 구상하였다. 중농 사상에 입각하여 토지 겸병(兼倂)을 억제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田制)를 개편, 세제·녹봉제(祿俸制)의 확립, 과거제의 폐지와 천거제의 실시, 신분·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 균등의 구현, 관제·학제의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였다.
뒷날 이익(李瀷)·홍대용(洪大容)·정약용(丁若鏞) 등에게 이어져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였으나, 정책으로는 채택되지 못하였다. 다만 학문적 가치가 인정되어 1770년(영조 46) 영조의 명으로 『반계수록』 26권이 간행되었다.
[저술 및 작품]
문장에 뛰어나서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지었고, 실학을 최초로 체계화하였으며, 이 밖에 20여 종의 저서와 문집을 남겼으나 남아 있지 않고, 『반계수록』과 『군현제(郡縣制)』1권이 전할 뿐이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에 있으며, 경기도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묘비의 비문은 1768년(영조 44) 류언지(柳彦摯)가 지었고 홍계희가 글씨를 썼다.
[상훈과 추모]
호조참의(戶曹參議)·찬선(贊善)에 추증되었고, 부안 동림서원(東林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