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C02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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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박종길 |
돌산향교 가 들어선 지명을 한자로 석전평(石田坪)이라 표기한다. 1896년 돌산군이 건립되자 돌산의 유림들은 가장 먼저 향교 건립에 나서 1897년에 향교가 건립될 수 있었다. 섬이라는 환경 때문에 업신여김을 당하던 밑바탕에는 배우지 못해 무식한 사람이라고 얕보인다는 자괴감이 팽배해 왔던 상황에서 향교가 건립된 것은 이들의 자부심을 세워주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석전평에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올리는 향교가 들어서자 선인들이 미리 알고 지명을 지어 놓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모양이다. 당시의 이야기는 『여산지(廬山志)』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석전평은 이 지역 밭에 돌이 많아 ‘돌밭등’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생긴 땅이름이다. 돌이 많아 이름 지어진 돌산도의 지명도 돌(突) 자를 파자하여 팔대산(八大山)의 유래를 만들었는데 아무튼 돌산도의 지명은 돌과 인연이 많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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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누정
조선시대 지방 교육 기관이었던 향교는 독립된 행정 구역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 부, 대도호부, 목에서 군과 현에 이르기까지 관학으로서 향교를 설치했다. 향교의 학생 수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부와 대도호부는 90명, 도호부는 70명, 군 50명, 현 30명을 둔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거의 내내 여수는 순천부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수향교의 역사가 짧다. 돌산향교와 여수향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1896년에 돌산군이, 1897년에 여수군이 새롭게 생기면서 세워졌다.
「돌산향교신설사적」에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돌산군이 새롭게 설치된 직후 먼저 사직단이 세워지고 이어 대성전·명륜당·풍화루(향교 정문) 등이 차례로 건립되었음을 적고 있다. 1913년 돌산군이 폐지되자 돌산향교 또한 사라질 위기를 맞았으나 현지 유림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모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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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향교 전경
대성전 상량문은 당시 숭정대부중추원부의장부장 동양(東陽) 신기선이 지었고 명륜당 상량문은 전 학부대신 이도재가, 풍화루 기록문은 당시 돌산군수였던 서병수가 지었다. 돌산향교는 그 규모가 작지만 공자의 위패를 으뜸으로 모시고, 4대 성인인 안자·자사·증자·맹자와 송나라 때의 4대 유학자인 주돈신·정신·정호·주희 및 신라 설총 이래 우리나라 18대 선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향교 건축은 교육 공간으로서 명륜당과 성현들에 제사를 모시는 존현 공간인 대성전이 함께 건립된다. 배치 방식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평지에 향교가 건립될 때 앞쪽 터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존현 공간을 두고, 뒤쪽 터에 명륜당을 세워 강학 공간을 두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산언덕에 터를 마련할 때에는 전면 낮은 곳에 명륜당을 세우고 뒷면 높은 터에 대성전을 세우는 전학후묘(前學後廟), 산언덕에 집터를 마련하면서도 들어가는 방향의 터에 명륜당을 세우고 옆 터에 대성전을 짓는 병렬형 배치가 있다.
돌산향교는 평탄한 지형에 좌학우묘(左學右廟)의 형태로 배치함으로써 향교 건축의 정통성에서 벗어나고 있어 남한 내 231개 향교 가운데 몇 안 되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러한 특성이 반영되어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었다.
돌산향교는 뒤늦게 설립되고 지역적으로 도서 지방에 위치하였지만, 현재 보관되어 있는 향교 문서 등을 볼 때 창설 초기에 이미 관례 이상으로 향교 발전에 성의를 쏟았고 봉사와 강학에 어느 지방 못지않게 열의가 있었다. 1915년에 폐묘의 위기가 있었으나 1922년 전라남도의 관리가 이곳을 순시하자 돌산의 유림이 항의 진정하여 직원과 장의 등의 임원이 복치되었다. 그 후 존성계를 계승하여 창선계를 조직하고 지방 교화와 향교 관리에 힘썼다. 특히 1931년에는 대성전을 다시 중수하였다.
광복 후에는 전쟁 등으로 훼손되어 방치되다가 문화재 보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라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86년에 명륜당을 중수하고 경내를 정화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지은 창고나 관리용 건물이 향교의 형식을 무시한 것이어서 경관을 해치고 있으므로 원상 복구를 위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근래에는 방학을 이용하여 지역 학생들에게 한문 교육과 예절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후손에게 조상의 문화유산을 물려주고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만나는 장으로서의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향교가 지역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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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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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