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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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炳瓚 |
이칭/별칭 | 중옥(中玉),돈헌(遯軒)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종길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거문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한 의병.
[개설]
임병찬(林炳瓚)의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이다. 아버지는 임용래(林榕來)이다.
[활동 사항]
임병찬은 1851년(철종 2) 2월 5일 지금의 전라북도 옥구군 서면 상평리 남산마을에서 태어났다. 1888년(고종 25) 호남에 큰 흉년이 들자 그해 11월 1,000냥을 내어 백성들을 구휼하고, 이어 3,000냥과 조(租) 70석을 내어 역시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다음 해 나라에서 징세(徵稅)을 하자 백성들에게 1석에 25전의 낮은 이자만을 받고 빌려주어 칭송을 받았다. 1899년(고종 36) 호남의 선비들이 임병찬의 그러한 공을 추천하여, 2월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兼 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樂安郡守 兼 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1894년(고종 31) 12월 1일 동학농민혁명군의 지도자 중 한 명인 김개남(金開男)을 고발하였고, 김개남은 12월 4일 처형되었다.
1906년 2월 임병찬은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태인[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초모(招募)·군량·연병(鍊兵)의 책임을 맡고 홍주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연락하면서 태인·정읍·순창·곡성 등을 쳐서 관곡을 군량으로 충당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같은 해 6월 순창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다가 최익현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2년 선고를 받고,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임병찬은 1907년(순종 1) 1월 귀국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은거하면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던 중, 1912년 9월 고종의 밀조(密詔)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전라남도순무대장(全羅南道巡撫大將)에 임명되었다. 이에 각지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초모하는 한편, 조직을 확대하여 12월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순무대장에 임명되었다. 1914년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상(李明翔)·이인순(李寅淳) 등과 상의하여, 독립의군부를 전국 조직으로 확대시켜 대한독립의군부를 만들었다. 임병찬은 총사령 자격으로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이하 대소 관헌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냈다. 여기에서 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 통치의 곤란함을 주지시키며, 외국에 대해서는 일제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일제를 일시에 구축하려는 의병운동을 계획하였다.
1914년 5월 일본 경찰에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잡힌 뒤 대한독립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이 탄로나면서 임병찬은 체포되었다. 임병찬은 옥중에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6월 13일 거문도[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로 유배되었다가 1916년 6월 23일 병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돈헌문집(遯軒文集)』이 있으며, 그중에 수록된 「돈헌문답기(遯軒問答記)」는 태인 의거 후 잡혀 취조를 당할 때의 기록과 1908년(순종 2) 5월 충청남도 천안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일본 헌병대장과 문답한 기록으로, 의병 운동사 및 사상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묘소]
임병찬의 묘소는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회문산(回文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임병찬은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166번지에 있던 하청사(河淸祠)에 최익현과 함께 배향되었으나, 하청사는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2020년 현재 하청사 터에는 담장과 출입문만 남아 있으며 내부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임병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