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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305
한자 陶窯址
이칭/별칭 가마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봉계동|소라면 사곡리|봉두리|율촌면 신풍리|가장리|취적리 산177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병호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는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가마터.

[분포]

여수의 도요지는 소라면율촌면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분청사기 가마터는 소라면 사곡리와 분계동에 분포한다. 백자 가마터는 율촌면소라면에 분포한다. 율촌면에는 신풍리 신산마을 뒷산, 가장리 가장저수지 동남쪽, 취적리 산177번지 일대에 있으며, 소라면에는 봉두리 천주교 공원 묘지 일대에 있다.

[분청사기 가마터]

1. 사곡리 분청사기 가마터

위치: 소라면 사곡리

사곡리의 북쪽 송전탑이 있는 산 경사면에 위치한다. 민묘가 조성되면서 일부가 파괴되었다. 이곳에서 수습된 도자편들은 대접·접시·발 등으로 대부분 16세기경에 제작된 귀얄문 분청사기들이다. 태토는 조질로 정서되지 않았으며 짙은 회색 또는 회흑색을 띤다. 기벽은 얇으며 입술은 대부분 바라졌다. 겉면에는 빙열이 있다. 유면은 기공과 철반점, 도드라진 태토의 사립 등으로 거칠다. 백토흙은 농담의 차이가 있어 붉은 것은 백토 분장된 아래 태토가 드러나 보인다. 덤벙기법으로 분장된 것은 굽안까지 전면이 백토분장되었다. 굽은 거칠게 깎인 죽절굽이며 굽안 중심이 볼록하게 돌출되었다. 포개구이를 위한 흙받침은 흙모래빚음이며 6~7개가 이용되었다.

2. 분계동 분청사기 1호 가마터

위치: 여수시 소라면 분계동

율촌면 반월리 삼산마을에서 소라면 사곡리로 향하는 683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율촌면소라면의 경계 지점에 동쪽으로 향한 작은 계곡이 있다. 이곳을 분두골 또는 분계동이라 한다. 가마터는 마을 동쪽 끝 북쪽의 산 사면에 있으며, 현재는 밭으로 개간되었다. 이곳에서 수습된 도편들은 발·대접·접시·병 등으로 16세기에 제작된 분청사기들이다. 이곳 출토물은 대부분 인화, 귀얄, 덤벙기법의 분청사기들이다. 이 가운데 인화나 덤벙 분청은 극히 작은 양이 발견되고 귀얄 분청이 주종을 이룬다. 태토는 사립과 잡물이 섞이는 등 정선되지 않았다. 인화문은 연판, 국화 방사상의 파상문 등이며 이들 문양은 내면에만 있다. 귀얄로 백토 분장된 대접, 접시 등은 내저 중앙과 외면은 거의 분장되지 않았다. 포개구이용 받침은 굵은흙모래받침이며 4~7개가 이용되었다.

3. 분계동 분청사기 2호 가마터

위치: 소라면 분계동

분계동 분청사기 1호 가마터에서 동쪽 계곡 안으로 100m 정도 들어가면 북쪽의 산 사면에 민묘들이 몇 기 조성되어 있다. 가마터는 이 민묘를 조성하면서 심하게 파괴되었다. 민묘 주변에서 발·대접·접시·병·항아리 등 16세기에 제작된 분청사기 도편들이 수습되었다. 분계동 분청사기 2호 가마터의 전반적인 성격은 1호 가마터와 비슷하다. 출토된 도자기의 기벽이 얇고 대접은 굽지름보다 넓은 내저원각이 있다. 기면은 인화, 조화, 귀얄, 덤벙기법으로 장식되었는데 문양이 없는 귀얄분청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인화문은 새끼문이며 문양 위를 귀얄로 백토분장하여 선명하지 않다. 이외에 기면에 여러 줄의 파상문을 돌린 후 귀얄로 분장한 것도 있다. 조화기법을 이용한 기면 장식은 항아리나 병 등에서 볼 수 있으며 간단한 선문과 연판문이 있다. 고개구이를 위한 받침은 흙모래빚음이며 6~7개가 이용되었다.

[백자 가마터]

1. 신풍리 백자 가마터

위치: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신산마을 뒷산

신풍리 신산마을 뒷산의 구릉 정상에 위치한다. 이곳은 비교적 평탄한 대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가마터는 민묘들에 의해 교란되었다. 주변에는 광산이씨 이영호(李永鎬)의 묘가 있다. 민묘의 주변에서 대접·접시·바래기·잔 등 17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백자편들이 수습되었다. 태토는 밝은 회백색 또는 회색을 띠며 입자는 곱고 정선되었다. 굽안은 시유되었고 겉면에 기공이 많다. 내저에 원각이 있고 오목굽과 변형된 오목굽이 있다.

2. 가장리 백자 1호 가마터

위치: 여수시 율촌면 가장리 가장리저수지 동남쪽

가장저수지 동남쪽에 있는 도로를 따라 15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산기슭에 위치한다. 가마터는 골재 사용을 위한 석산 개발로 파괴되었다. 길가 또는 언덕 위의 흙더미에서 발·대접·잔·바래기·병 등 17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백자편들이 수습되었다. 태토는 정선되었으며 치밀하다. 굽안에 시유되었으며, 유색은 회청색이 많다. 겉면에 가는 철반점이 다수 드러나 보이며 빙열은 심하지 않다. 그릇의 내저에 원각이 있으며 입술은 바라진 것이 많다. 굽은오목굽과 변형오목굽이 있다. 받침은 태토빚음이며 대체로 4개가 이용되었다.

3. 가장리 백자 2호 가마터

위치: 여수시 율촌면 취적리 산 77번지 일대

국사봉 아래 넓게 형성된 분지에 위치한다. 가마터는 현재 논과 밭으로 개간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 3기의 백자 가마터 가운데 1기는 허이부의 집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지점에 있다. 발·대접·접시·바래기·잔 등 대부분 17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백자편들이 수습되었다. 겉면에 발라진 유약은 광택이 있고 굽 주변에는 일부 유약이 뭉쳤거나 밀려나 깨끗하지 못한 것도 있다. 기벽은 얇고 내저에 뚜렷한 원각이 있다. 굽은 오목굽과 변형오목굽이 있다. 대체로 굽과 몸체와의 경계가 확실치 않으며 굽안은 전반적으로 얕게 깎였다. 굽다리는 모두 낮고 내경되며 굽안중심이 볼록하게 돌출되었다. 포개구이를 위한 받침은 태토빚음이며 4~5개가 이용되었다.

4. 가장리 백자 3호 가마터

위치: 율촌면 취적리 산 177번지 일대

국사봉 아래 허이부의 집에서 남쪽의 골짜기로 향한 소로를 따라 약 50m 정도 가면 밭으로 개간한 넓은 평지가 나온다. 깎아낸 산의 단면과 길 양옆에서 발·대접·접시·바래기·잔 등 대부분 17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백자편들이 수습되었다.

태토 안에는 미세한 철반점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굽안에는 시유되었으며 유색은 회청색을 띤다. 굽 주변에 유약이 약간씩 밀리거나 뭉쳐있어 깨끗하지 않다. 내면에 원각이 있는 것들이 많이 보인다. 굽은 오목굽과 변형오목굽이 함께 발견되며 굽바닥을 깎지 않은 평굽도 있다. 포개구이를 위한 받침은 태토빚음이며 4~5개가 이용되었다.

5. 가장리 백자 4호 가마터

위치: 율촌면 취적리 산 177번지 일대

3호 가마터에서 남쪽으로 향한 작은 길을 따라가면 수암산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에 민묘 1기가 있다. 가마터는 이 뒷산 경사면에 위치한다. 이곳에서는 매우 많은 양의 백자편들이 발견되었다. 땅 밑에는 잘 보존된 가마터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접·접시·잔 등 대부분 17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백자편들이 수습되었다. 수습된 백자조각들을 분석해보니 취적리의 투구봉 근처에 있는 가마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토는 그리 치밀하지 않으며 짙은 회색 또는 회청색을 띠고 있는 것이 많았다. 태토 안에는 기포가 많다. 굽안까지 시유하였으며 유색은 회색 또는 회갈색을 띤다. 유면에는 기공과 철반점이 있으나 광택이 난다. 입술은 바라졌고 내저에 원각을 뚜렷하게 넣었다. 굽은 오목굽이며 몸체와의 구분이 뚜렷하다. 굽다리는 내경되었으며 굽안이 깊고 접지면의 폭은 대체로 좁고 일정하다. 굽안 중심이 볼록하게 돌출되었다. 포개구이를 위해 사용된 그릇 사이의 받침은 2가지로 모래받침과 태토빚음이다. 이들 두 방법은 그릇에 따라 가각 이용되거나 함께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 봉두리 백자 가마터

위치: 여수시 소라면 봉두리 천주교 공원묘지 일대

봉두리 상의곡마을에서 북쪽으로 향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천주교 공원묘지가 나온다. 가마터는 이 공원묘지 입구 쪽의 포장된 갈림길 주변에 위치한다. 가마터는 현재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모두 파괴되었으며, 길가의 깎인 단면과 바닥에 일부 퇴적층이 남아 있다. 대접과 접시 등 대부분 17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백자편들이 수습되었다. 태토는 철반점과 기공이 보이며 회청색 또는 회색이다. 유면은 광택이 있고 태토는 입자가 치밀하고 굽안까지 시유되었다. 유색이 짙은 경우 굽 주변의 유약이 약간씩 밀려 뭉쳐 있는 것들이 있다. 기벽이 얇고 내저에 원각이 뚜렷하다. 굽은 단정하게 깍은 오목굽이며 굽다리는 모두 내경되었다. 그릇가운데 굽과 몸체가 뚜렷이 구분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대접은 대부분 전자에 속하며 접시는 후자가 많다. 접시 가운데도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 있는데 이런 경우 유태의 색이 밝다. 대접은 유면이 곱고 유태의 색이 밝을수록 굽과 몸체와의 구분이 뚜렷한데 이는 시기적인 차이로 여겨진다. 포개구이를 위한 받침은 태토빚음이며 4~5개가 이용되었다.

[의의 및 평가]

가마터가 조성된 시기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16세기, 백자 가마터가 17세기 후반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비교적 다양하며 민수용 도자기들로서 가마터와 함께 여수의 도자사를 정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농지정리 및 도로개설 등으로 도자터의 유실이 급격히 일어나고 있다. 방치된 도자터를 보존, 관리해서 체계적인 도자자료의 정리와 도자터 관리 등이 시급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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