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2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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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水陸大齋 |
영어의미역 | Rites for Mountains and Earth Spirits of Heungguksa Temple |
이칭/별칭 | 천지명양 수륙재,수륙무차평등재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진옥 |
성격 | 불교의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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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시기/일시 | 초파일을 전후로 추정 |
의례장소 | 흥국사 |
신당/신체 | 보신불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서 수륙의 일체 고혼을 천혼하는 공양의례.
[개설]
수륙재는 정치적인 격변기에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을 국가적 차원에서 진무하기 위해 생성된 불교의례이다. 여기에는 내생(來生)을 받지 못하고 떠도는 수많은 원혼을 집단적으로 해원시키며, 동시에 신도들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구가 담겨 있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무제는 신승의 계시에 따라 유주무주(有住無住, 떠도는 넋)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짓고 재를 설(設)한 것이 처음이라고 전해진다.
고려 때는 국중수륙대재(國中水陸大齋)를 실행하였고, 조선의 태조도 진관사(津寬寺)와 석왕사에서 시행하였다. 수륙재는 조선조 중엽까지 국가의례로서 전승되던 중 유생들의 반대로 중단되었다가 오늘날에는 민중적인 의례로 전환되어 사찰 마당이나 강 또는 바다에서 시행하고 있다. 수륙재의 수륙은 여러 신선이 흐르는 물에서 음식을 취하고, 귀신이 깨끗한 땅에서 음식을 취한다는 뜻에서 따온 말이므로 청정한 사찰 또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행하여도 무방하다.
[연원 및 변천]
1599년 임진왜란 이후 민심수습을 위해 국가 위령제로서 수륙재를 개설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승수군 300여명이 참전하였고, 종전 후의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선조대왕이 600여석의 쌀을 공양하여 자운 스님과 300여 대중, 그리고 통제영의 모든 백성이 합동으로 천혼재를 지내게 된 것이 연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충무공이 전사한 남해 노량에서 청혼을 하여 전라좌수영 영내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흥국사가 중창되면서 흥국사로 옮겨 300여 년간 시행되었다. 1896년 좌수영 폐지와 함께 승군도 해체되면서 수륙재가 쇠퇴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였으며, 해방된 이후 부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현재는 매년 진남제의 행사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흥국사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석가모니불인 화신이며 수륙대재의 주불은 보신인 노사나 부처님이다. 이는 중생을 위한 자비심이 강조되던 것과 무관치 않다. 부처의 삼신 가운데 보신은 중생을 위하는 공덕의 몸이라는 뜻이므로, 그 당시 백성을 위하는 자비심과 일치한다.
[절차]
수륙재는 부처님의 위신공덕으로 악도에서 헤매는 중생을 건진다는 뜻이므로, 먼저 바다와 육지에서 돌아가신 고혼을 바닷가에 나가 청혼하는 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다음에 불보살을 모시는 시련의식과 부처님께 공양하는 불공, 모든 중생을 위하는 설법, 그리고 영혼들에게 베푸는 시식, 중생에게 베푸는 회향, 마지막 위패를 태워 영혼을 보내는 소전의식으로 진행한다.
[축문]
불공의식 때 모든 영가가 천도되기를 기원하는 축원문 및 발원문이다.
[부대행사]
재가 끝날 무렵에 산사람과 영혼 그리고 모든 중생에게 베풀고 화합하는 행사인 회향이 있다. 이때 회심곡, 북춤 등 예술 공연이 펼쳐진다.
[현황]
400여 년간 시행했던 유물들이 현재 대다수 남아 있으며(「흥국사 괘불탱화」, 수륙재 경판, 수륙재의 문 등), 현재에도 매년 수륙재를 매년 5월 초 거북선대축제의 일환으로 시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