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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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巨文島事件 |
영어의미역 | The British Occupation of Geomoondo Affair |
이칭/별칭 | The British Occupation of Geo moon do(Port Hamilton) affair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송은일 |
성격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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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885년 4월 15일 |
종결연도/일시 | 1887년 2월 27일 |
발생(시작)장소 | 거문도 |
[정의]
1885년(고종 22) 4월 15일 영국이 동양함대를 파견하여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엽 산업자본이 독점자본으로 성장하면서 해외 시장을 개척하려는 서구 열강들의 각축은 더욱 치열해져 식민지 침략의 손길이 동북아시아까지 뻗치기 시작하였다. 1860년 러시아는 한반도 동해(東海)에 임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점하였으나, 이 항구는 겨울철에 얼어붙어 해만(海灣)으로서의 활용 가치가 적었으므로 또 다른 부동항(不凍港)을 물색 중에 있었다. 러시아가 부동항 대상지로 주목했던 곳은 함경남도 영흥만(永興灣)·제주도·쓰시마[對馬島] 등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영흥만을 가장 유력한 점령 대상지로 주목했던 것이다. 한편, 세계 각지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었던 영국은 러시아의 조선 진출에 대하여 방관할 수만은 없었으며 그 대응으로 거문도를 점령했던 것이다.
[발단]
태평양으로 진출을 꾀하던 러시아는 전략적 요충지가 필요했으며, 이를 얻고자 조선에 접근하여 1884년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활발한 외교활동을 통해 조선에서 친러 세력을 확대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곧 영흥만을 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경과]
이러한 러시아의 행동에 민감한 태도를 보인 나라는 그동안 조선에서 세력적 우위를 선점하고자 했던 청과 일본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 또한 러시아의 조선 진출에 대하여 방관할 수 없었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러시아가 점령 대상지로 삼았다는 영흥만 일대를 탐사한 후, 1885년 4월 15일 청의 양해 하에 군함 6척과 상선 2척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고 그 달 하순경 영국기를 게양하였다.
거문도는 지형의 특성상 대한해협의 문호에 해당하는 곳이며, 러시아 동양함대의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영국군의 이러한 조치는 명백히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해밀턴섬(Port Hmilton)이라 부르고, 병영을 세우고 포대를 쌓는 등 영구적인 주둔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는 영국 부영사(副領事)와 청 주재 영국 대리공사(代理公使)에게 항의를 제기하였다. 또 미국·독일·일본에게 조정을 요청하는 한편,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교섭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조선 정부를 통하여 영국에 항의문을 제출하는 한편, 청에 사건의 중재를 요청하며 자신들이 조선의 영토를 점령할 것이라는 위협까지 하였다.
한편, 조선에 대하여 종주권을 자임하던 청은 이 사건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 무렵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위기가 고비를 넘기고 9월 10일 아프가니스탄 협상이 조인됨에 따라,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은 이때가 거문도 문제를 해결할 적기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
[결과]
이홍장은 2년여에 걸쳐 영국과 교섭을 벌인 결과, 청나라 주재 러시아공사로부터 러시아는 조선의 영토를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통보하였다. 이에 따라 1887년(고종 24) 2월 27일 영국군은 거문도를 점령한 지 22개월 만에 철수하게 되었다.
거문도 점령 사건의 결과 해결을 위한 협상이 당사국인 조선을 배제하고 이루어짐으로써 조선의 국제적 위상은 더욱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반면, 청은 거문도 점령 사건 해결을 위한 외교 교섭을 전담함으로써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더욱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