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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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八城里古城山烽燧址 |
이칭/별칭 | 고성산연대봉화(古城山烟臺烽火),고성산봉수(古城山烽燧),성산봉수(城山烽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산54-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조선/조선 |
집필자 | 신종환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대구 대학교 중앙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시 지표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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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산54-1 일원 |
성격 | 산성내 봉수|봉수터 |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 있는 삼국 시대 봉수터.
[개설]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유적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에 있는 높이 211.4m의 구봉산 정상에 위치한다. 팔성리 고성산성 터를 이루고 있는 높이 200m 내외의 아홉 개 봉우리로 연결된 능선 가운데, 두번째 봉우리에 봉수터 유적이 있다. 산성 내 시설로 파악되므로 산성의 건립 시기인 삼국 시대에 건립된 봉수로 추정된다.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유적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의 문헌 기록에 고성산 연대봉화(古城山烟臺烽火), 고성산 봉수(古城山烽燧), 성산 봉수(城山烽燧)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며, 직봉(直烽)으로서 남쪽의 영니산 봉수를 받아 북쪽의 관덕리 마산 봉수로 전했다. 현재 주변은 공원 개발과 개간으로 파괴되었으며 봉수터 위치에는 묘지가 조성되어 있어 봉수 시설과 관련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변천]
팔성리 고성산성터 유적과 관련한 문헌 기록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와 『영남읍지(嶺南邑誌)』,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나타나고 있지만,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와 관련한 내용은 이보다 이른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의성현조에 보인다. 즉, “현내의 고성산 연대 봉화는 남쪽으로 영니산 연대 봉화와 더불어 서로 겨눈다. 현의 북부에 있는 마산 연대 봉화는 남쪽으로 현 내의 고성산 연대 봉화와 더불어 서로 겨눈다[縣內古城山烟臺烽火 南與盈尼山烟臺烽火相准 縣北部馬山烟臺烽火 南與縣內古城山烟臺烽火相准].” 라는 내용으로 직봉의 노선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의성현조에도 “고성산 봉수는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남으로 영니산에 응하고 북으로 마산에 응한다[古城山烽燧 在縣南五里 南應盈尼山 北應馬山].”라고 하였다.
한편, 1760년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영남읍지』의 의성현 지도에는 남대천의 남안(南岸)에 있는 구성산(九成山)의 성산 봉수(城山 烽燧)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를 분명히 묘사하고 있다. 이어서 조선 후기인 1832년경 편찬된 『경상도읍지』 의성현조에는 “고성산 봉수는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영니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마산 봉수에 응한다[古城山烽燧 在縣南五里 南應盈尼山 北應馬山].” 라고 하였고, 이 같은 내용은 1871년 간행된 『영남읍지』에도 나타나고 있다. 다만 『경상도읍지』에서는 “영니산 봉수가 폐지되었다[盈尼山烽燧 在縣南 今廢].”라고 기록하고 있어 고성산 봉수가 남쪽으로 영니산 봉수와 응한다는 기록과 상충되며, “대야곡(大也谷) 봉수가 현의 남쪽 20리에 있고, 북쪽으로 성산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승원산봉수에 응한다[大也谷烽燧 在縣南二十里 北應城山 南應蠅院山].”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1760년 이전에 영니산 봉수가 폐지되고 대야곡 봉수가 고성산 봉수와 직결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1864년경에 편찬된 『대동지지』에서는 “성산 봉수는 [현의] 서쪽 5리에 있다[烽燧 城山 西五里].” 라고 간단히 위치만 표현하고 있다.
이상의 자료로 볼 때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유적은 조선 전기부터 주요 봉수로인 직봉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말기까지 그 기능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는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팔성리 산54-1 일대에 위치한다. 팔성리 고성산 산성터 유적 내에 해당한다. 의성읍 시가지의 남단에 있는 의성 중학교에서 서쪽으로 중앙선 철길을 가로질러 나가, 강변도로인 남대천길을 따라 남쪽으로 200m 정도 가면 제2구봉교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 다시 남쪽으로 170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넓고 긴 골짜기가 나오는데, 이 골짜기 입구가 팔성리 고성 산성의 관문이며 봉수터 유적은 골짜기 끝의 산봉우리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유적에 대한 학술 조사는 1998년 4월~5월 사이에는 의성 문화원 향토사 연구소에서 의성 관내 봉수 유적에 대한 문헌 조사와 지표 조사가 있었다. 또한 2004년 대구 대학교 박물관에서 『의성군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작성을 위한 지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굴 조사는 없었다.
[현황]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유적의 주변을 이루는 팔성리 고성산 산성터 일대는 공원 개발과 경작으로 인해 절토 혹은 삭토되거나 농로가 나는 등 지형의 변형이 많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봉수터로 추정되는 지점에도 묘지가 조성되어 있어 봉수 시설과 관련한 유구는 확인할 수 없다. 주변은 전반적으로 숲이 우거진 상태이며, 봉수터 북쪽 사면에는 수도사가 자리 잡고 있고, 남동쪽 봉우리에는 팔성리 봉의정이 있다.
[의의와 평가]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는 1760년에 발간된 『여지도서』와 1871년에 간행된 『영남읍지』에 그림으로 나타나 있는 구성산의 성산 봉수로서, 조선 시대 봉수 체계상 직봉(直烽) 노선에 해당한다. 의성군 지역을 통과하는 직봉은 부산 동래에서 출발하여 서울 목멱산으로 전달되는 제2로인데, 이 노선 상에 해당하는 의성군 내의 봉수 가운데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가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의성현의 치소에 가까이 접해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봉수터 유적은 『경상도읍지』 등의 문헌 자료에 정유재란을 전후한 관련 기사가 전해오는 성산산성 즉, 팔성리 고성산 산성터 내에 있다는 점에서, 산성과 함께 그 기능과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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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7 | 지번 수정 및 영니산 봉수 관련 서술 추가 | 지번 수정 : 산29-1 -> 산54-1 변천 서술 추가 : 다만 <서명>『경상도읍지』</서명>에서는 “<지명>영니산 봉수</지명>가 폐지되었다[盈尼山烽燧 在縣南 今廢].”라고 기록하고 있어 <지명 검색="1" 검색어="고성산 봉수">고성산 봉수</지명>가 남쪽으로 <지명>영니산 봉수</지명>와 응한다는 기록과 상충되며, “<지명>대야곡(大也谷) 봉수</지명>가 현의 남쪽 20리에 있고, 북쪽으로 성산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승원산봉수에 응한다[大也谷烽燧 在縣南二十里 北應城山 南應蠅院山].”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1760년 이전에 <지명>영니산 봉수</지명>가 폐지되고 <지명>대야곡 봉수</지명>가 <지명 검색="1" 검색어="고성산 봉수">고성산 봉수</지명>와 직결되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