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200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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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烽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의성군 |
집필자 | 신종환 |
[정의]
경상북도 의성 지역에 분포한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과 시설.
[문헌 사료에 보이는 의성의 봉수]
의성군의 봉수와 관련된 최초의 문헌 기록은 1425년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의성군 관내 봉수 유적들은 『경상도지리지』의 의성현(義城縣)을 비롯하여 비안현(比安縣), 안정현(安貞縣), 다인현(多仁縣) 조에 나타나 있다.
의성현조에는 “영니산 봉화는 현의 남쪽 20리 정도에 있으며 남쪽으로 25리 떨어져 있는 의흥현의 승목산 봉화를 받아 현 내의 북쪽 30리 거리에 있는 마산 봉화에 전한다[盈尼山烽火 在縣南二十里許 南望義興縣地縄木山烽火 相去二十五里 北望縣地馬山烽火 相去三十里].”고 했고, “마산 봉화는 [영니산 봉화를 받아] 북쪽으로 15리 거리에 있는 안동에 속한 일직현의 감곡산 봉화에 보낸다[馬山烽火 北望安東任內一直縣地甘谷山烽火 相去十五里].”고 하여, 영니산 봉화와 마산 봉화만 서술하고 있다.
비안현조에는 “간점현 봉화는 현의 남쪽 15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25리 300보 거리에 있는 군위 땅의 마정산 봉화를 바라고, 북쪽으로 30리 270보 거리에 있는 안정현 땅의 대암산 봉화를 바라본다[肝岾峴烽火 在縣南十五里許 南望軍威地馬井山烽 相距二十五里三百步 北望兼安貞縣地大岩烽火 相距十三里二百七十步].”고 하였다.
안정현조에서는 “대암산 봉화는 현의 서쪽 5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30리 270보 떨어진 비옥현 땅의 간점산 봉화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30리 180보 떨어진 예천군에 속한 다인현 땅의 소이산 봉화를 바라본다[大岩山烽火 在縣西五里許 南望比屋縣地肝岾山烽火 相距十三里二百七十步 西望醴泉郡任內多仁縣地所伊山烽火 相距三十里一百八十步].”고 하였다.
다인현조에서는 “소이산 봉화는 현의 남쪽 15리 정도에 있는데, 동쪽으로 30리 180보 거리의 안정현 땅 대암산 봉화를 바라고, 북쪽으로 26리 220보 거리에 있는 함창현 땅의 쌍화산 봉화를 바라본다[所伊山烽火 在縣南十五里許 東望安貞縣地大岩山烽火 相距三十里一百八十步 北望咸昌縣地雙花山烽火 相距二十六里二百二十步].”고 하였다.
한편 1454년에 발간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의성현조과 비안현조에서는 봉수와 관련된 내용이 보다 소략하게 나타나 있다. 먼저 의성현조에는 “봉화는 두 곳에 있는데, 현의 남쪽에 있는 영니산 봉화는 남쪽으로 의흥현의 승목산 봉화를 겨누고, 북쪽으로 현내의 마산 봉화를 겨눈다. 마산 봉화는 북으로 일직현 감곡산 봉화를 겨눈다[烽火二處 盈尼山 在縣南 南准義興縄木山 北准本縣 馬山 馬山 北准一直甘谷山].”고 했다.
비안현조에는 “봉화가 두 곳에 있는데, 비옥현 내에 있는 간점산 봉화는 남쪽으로 군위현의 마정산 봉화를 겨누고, 북쪽으로 안정현의 대암산 봉화를 겨눈다. 대암산 봉화는 서쪽의 다인현 소이산 봉화를 겨눈다[烽火二處 肝岾山在比屋縣內 南准軍威馬井山 北准安貞大岩 大岩西准 多仁所伊山].”고 했다.
이어서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의 의성현조에는 “현 남쪽의 영니산 연대봉화는 남쪽으로 의흥현 승목산 연대봉화와 더불어 서로 겨누고, 현 내의 고성산 연대봉화는 남쪽으로 영니산 연대봉화와 더불어 서로 겨눈다. 현 북부에 있는 마산 연대봉화는 남쪽으로 현 내의 고성산 연대봉화와 더불어 서로 겨누고, 북으로 안동에 속한 일직현의 감곡산 연대봉화와 서로 겨눈다[縣南盈尼山烟臺烽火 南與義興縣縄木山烟臺烽火相准 縣內古城山烟臺烽火 南與盈尼山烟臺烽火相准 縣北部馬山烟臺烽火 南與縣內古城山烟臺烽火相准 北與安東任內一直縣甘谷山烟臺烽火相准].” 라고 했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의성현조과 비안현조에 봉수 관련 기사가 있다. 의성현조에서는 “마산 봉수는 북으로 안동부 감곡산 봉수에 응하고 남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 고성산 봉수는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남으로 영니산에 응하고 북으로 마산 봉수에 응한다. 영니산 봉수는 현의 남쪽 25리에 있는데, 남으로 의흥현 승목산 봉수에 응하고 북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馬山烽燧 北應安東府甘谷山 南應古城山 古城山烽燧 在縣南五里 南應盈尼山 北應馬山 盈尼山烽燧 在縣南二十五里 南應義興縣縄木山 北應古城山].”고 했다.
비안현조에는 “간점산 봉수는 남쪽으로 군위현 마정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대암산 봉수에 응한다. 대암산 봉수는 남쪽으로 간점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예천군 소이산 봉수에 응한다[肝岾山烽燧 南應軍威縣馬井山 北應大岩山 大岩山烽燧 南應肝岾山 北應醴泉郡所伊山].”고 하였다.
조선 후기인 1832년경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의성현조에는 다음과 같은 5개소의 봉수를 기록하고 있다. “마산 봉수는 현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안동부의 마곡산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 고성산 봉수는 현의 남쪽 5리에 있는데, 남쪽으로 영니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으로 마산 봉수에 응한다. 영니산 봉수는 현의 남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계란산 봉수는 현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마산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고성산 봉수에 응한다. 대야곡 봉수는 현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성산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승원산 봉수에 응한다. 승원 봉수는 현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북쪽으로 대야곡 봉수에 응하고 남쪽으로 의흥현 승목산 봉수에 응한다[馬山烽燧 在縣北三十里 北應安東府馬谷山 南應古城山 古城山烽燧 在縣南五里 南應盈尼山 北應馬山 盈尼山烽燧 在縣南 今廢 鷄卵山烽燧 在縣北十五里 北應馬山 南應古城山 大也谷烽燧 在縣南二十里 北應城山 南應蠅院山 蠅院烽燧 在縣南三十里 北應大也谷 南應義興蠅木山].”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비안현조에는 성지(城池)도 없고 봉수(烽燧)도 없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은 서술은 『영남읍지(嶺南邑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비교해 볼 때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1864년경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의성현조에 나타난 봉수는 마산 봉수, 계란현 봉수, 성산 봉수, 대야곡 봉수, 승원 봉수의 위치만 간략히 나타내고 있다.[烽燧 馬山北三十里 雞卵峴北十里 城山西五里 大也谷南二十里 蠅院南三十五里]
[문헌 사료로 본 의성의 봉수 체계]
앞에서 살펴본 내용과 함께 1760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타난 기록을 토대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의성현 관내의 봉수 선로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직봉은 의흥현 승목산 → 의성현 영니산 → 의성현 마산 → 안동 일직현 감곡산으로 이어지고, 간봉은 군위현 마정산 → 비안현 간점현 → 비안현 대암산 → 다인현 소이산 → 함창현 쌍화산으로 연결된다.
1469년 간행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서는 직봉이 의흥현 승목산 → 의성현 영니산 → 의성현 고성산 → 의성현 마산 → 안동 일직현 감곡산으로 이어지고, 간봉은 군위현 마정산 → 비안현 간점산 → 비안현 대암산 → 다인현 소이산 → 함창현 쌍화산으로 연결되어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760년에 편찬된 『여지도서』에서는 직봉이 의흥현 승목산 → 의성현 승원산 → 의성현 대야곡 → 의성현 고성산 → 의성현 계란산 → 의성현 마산 → 안동 일직현 감곡산으로 연결되어, 이전의 영니산 봉수가 폐지되고 대신 승원산과 대야곡의 봉수가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봉은 군위현 마정산 → 비안현 간점산 → 비안현 대암산 → 다인현 소이산 → 용궁현 용비산으로 연결되어 이전과 큰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의성군 내에서 확인되는 봉수터 유적을 연결해 보면, 직봉의 전달 체계는 청로리 승원산 봉수터 → 수정리 영니산 봉수터 → 만천리 대야산 봉수터 →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 상화리 계란산 봉수터 → 관덕리 마산 봉수터로 이어지고 마산 봉수는 다시 북쪽의 안동시 일직면에 있는 감곡산 봉수로 이어지는 것으로 정리된다. 또 간봉은 남쪽 군위군의 마정산 봉화로부터 신호를 받은 도암리 간점산 봉수터 → 봉양리 대암산 봉수터 → 덕미리 소이산 봉수터 → 봉정리 비봉산 봉수터로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봉양면에 있는 삼산리 백산 봉수터와 비안면에 있는 장춘리 봉수터, 신평면에 있는 청운리 봉수터, 의성읍에 있는 치선리 봉수터와 점곡면의 명고리 봉수터는 문헌 기록상 그 상응하는 봉수를 확인하기 어렵다. 아마도 조선 시대 이전에 사용된 봉수였거나, 지역에서 유사시 필요에 따라 한시적으로 활용된 봉수가 아닐까 여겨진다. 다만 삼산리 백산 봉수터와 장춘리 봉수터는 군위군과 경계를 이루는 의성군의 남쪽에 위치해 있고, 직봉인 청로리 승원산 봉수터와 간봉인 도암리 간점산 봉수터에 인접해 있다는 점에서 직봉과 간봉의 보조 역할을 담당했던 봉수일 가능성도 엿보인다.
[의성의 봉수 유적 현황]
현재까지 밝혀진 의성 지역의 봉수대 유적은 관덕리 마산 봉수터, 상화리 계란산 봉수터, 삼산리 백산 봉수터, 도암리 간점산 봉수터, 장춘리 봉수터, 청운리 봉수터, 봉양리 대암산 봉수터, 치선리 봉수터,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명고리 봉수터, 만천리 대야산 봉수터, 수정리 영니산 봉수터, 청로리 승원산 봉수터, 덕미리 소이산 봉수터, 봉정리 비봉산 봉수터 등 모두 15개소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수정리 영니산 봉수터, 팔성리 고성산 봉수터, 상화리 계란산 봉수터, 봉양리 대암산 봉수터, 봉정리 비봉산 봉수터, 치선리 봉수터 등은 산성 내에 입지하고 있다. 유적의 위치는 만천리 대야산 봉수터 유적이 높이 188.2m로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며, 대부분 300m를 넘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다만 청운리 봉수터와 명고리 봉수터, 수정리 영니산 봉수터가 400m를 넘는 곳에 있고, 봉정리 비봉산 봉수터가 579m로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의성의 봉수터 유적들은 현재 대부분 석축이 무너지고 유실되어 그 원상을 유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체로 산성 터 유적과 함께 조선 시대 말 통신 제도의 변화가 일어나자 그 기능이 폐지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대부분 사유지로서 삼림이 우거진 산지에 위치하고 있어 유적의 보존과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2009년 부분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영니산 봉수터 유적을 제외하고는 본격적인 학술 조사를 실시한 유적도 없어, 봉수의 축조 시기나 구조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의성의 봉수 유적이 갖는 의의]
조선 시대의 봉수 체계는 직봉과 간봉으로 구분되며, 직봉은 서울과 변방 국경 지역을 연결하는 선로로서 팔도에 모두 5개의 노선이 있었다. 이 가운데 의성 지역을 통과하는 봉수는 제2로에 해당한다. 간봉은 직봉의 보조 노선으로서 직봉 간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필요한 곳에 설치되어 운영된 봉수였다. 세종 때 그 설치와 제도가 확립된 조선 시대의 봉수는 1895년에 전면 폐지될 때까지 중요한 정보 통신 수단으로 사용 되었는데, 문헌에는 봉화(烽火) 또는 연대봉화(烟臺烽火)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의성군의 봉수터 유적 분포는 산성의 분포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의성군의 지형이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짧지만, 봉수터 유적은 산성처럼 남북으로 조밀하게 분포한다. 의성의 남단인 청로리 승원산 봉수터로부터 북단의 관덕리 마산 봉수터까지는 조선 시대의 직봉 노선과 일치하고 있다. 이는 현재 의성군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는 중앙선 철도와 중앙 고속 도로의 노선과도 거의 일치하는 방향이다. 그리고 도암리 간점산 봉수터로부터 북서쪽으로 덕미리 소이산 봉수터로 이어지는 노선은 조선 시대의 간봉 노선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의성 지역에 조선 시대 봉수로의 직봉과 간봉이 모두 통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헌 자료와 유적 분포 현황을 통해 볼 때, 의성 관내의 봉수터 유적은 서울로 통하는 내륙의 중심부에 해당하며, 남쪽에서 올라오는 직봉과 간봉 노선이 서로 가까운 거리로 근접하다가 다시 간봉이 북서 방향으로 분기되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