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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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城-矗石樓 |
영어음역 | Jinjuseong gwa Chokseongnu |
영어의미역 | Jinjuseong Fortress and Chokseongnu Pavilion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김덕현 |
[정의]
진주를 대표하는 명승지. 진주성(晋州城)은 남성동과 본성동에 위치하며, 촉석성(矗石城) 혹은 진양성(晋陽城)으로도 불린다. 조선시대 진주성의 내성과 그 주변 지역 176,804㎡로,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촉석루(矗石樓)는 남강 가 돌벼랑 위에 세워진 우뚝한 누각으로, 남강 가 뾰족뾰족한 돌의 모양을 따서‘촉석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진주성의 남장대로, 북장대·서장대와 함께 진주성 3대 장대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의 연혁]
전해오는 얘기로는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고 하나, 조선 초 하륜(河崙)의 「진주성문기(晋州城文記)」에 따르면, 원래 토성이 있었는데, 고려 우왕 3년(1377) 흙으로 다시 쌓았으나 곧 무너져 우왕 5년에 석축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주위 800보, 높이는 3길, 문은 3개). 이후 조선 세종 때 성의 확대 축성이 이루어졌고, 1461년(세조 7) 새로 돌로 쌓은 진주성은 둘레가 4460척이고, 높이는 15척으로 기록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선조 24) 전쟁에 대비하여 영호남에 읍성을 수축하였는데, 이때 낮고 저습한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진주성전투에서 확장된 동문 쪽이 집중 공격을 받았고, 계사년(1593) 진주성 함락 때 동남쪽 모퉁이가 무너지면서 함락되었다. 이 점에 대하여 이로(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촉석성은 아득한 신라 때부터 요새를 설치한 곳인데 천백 년을 지나서도 조금도 퇴락하지 않고 칡덩굴이 얽혀지고 이끼가 감싸서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았다. 그런데 김수(金睟)는 성이 작다는 것을 탓하여 동남쪽 모퉁이를 헐고 물이 고이는 진흙탕까지 물려 쌓았으니 다만 신축한 것이 완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물이 조금만 넘어도 곧 꿰뚫어 팠으며 성이 넓고 또 낮아서 적이 도리어 높은 위치에 서게 되므로 지키기 어려운 형상이라는 것을 안목이 있는 사람이면 다 알고 있었다(矗石城 愛自新羅 相方設險 更千百年 少無崩缺 藤蘿繆結 苔蘚盖覆 若天成者然 睟以城小爲嫌 毁東南一隅 退築于洿濘之地 非惟新築不完 水小漲輒衝嚙 城濶且低 敵反升高 難守之形 有目皆知)”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이수일(李守一)이 병영을 촉석성으로 옮기고 김수가 쌓은 성이 너무 넓어 지키기 힘들다 하여 이순(李珣)의 집터까지 등이어 쌓았다. 사방으로 모두 큰 홍예문을 설치하고, 내외문의 위에는 모두 누(樓)가 있었다. 수문 2개, 대변루 2개 등은 모두 일시에 세웠다. 정미년(1607)에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내성과 외성에 포루 12개를 설치하였으며, 또 무오년(1618)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내성의 동문을 개건하고, 문 옆에는 또 대변루(待變樓)를 설치하였다(『진양지』성곽조). 조선 후기 진주성의 규모는 내성은 주위 800보, 높이 25척, 성가퀴 160, 우물이 3개이며, 외성은 주위 2,650보, 높이 25척, 성가퀴 1,646, 옹성 3, 수문 1, 암문 1, 해자 4개로 『대동지지』에 기록되어 있다.
고종 32년(1895) 13도제가 실시되어 경상도가 경상남도, 경상북도로 나뉘면서 진주는 경상남도의 감영(도청) 소재지가 되어 감영이 진주성 내 경상우병영 자리에 들어섰다. 지금은 감영 정문인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망미루(望美樓)만 남아 있다. 일본강점기 때 진주는 1925년까지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였는데, 이때 도시계획의 명목으로 진주성은 헐리기 시작했다. 진주성 북쪽 연못인 대사지(大寺池)를 매립하여 진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진주초등학교 터)와 진주경찰서, 그리고 본성동로 일대의 진주성은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만들기 위해 대부분 해체되었다. 특히 촉석루 뒤쪽 언덕은 공원화되고, 그 가운데 일본 신사가 건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해체되고 한국전쟁 등으로 방치되었던 진주성은 1969년부터 제1차진주성 복원사업이 추진되었다. 1972년에는 촉석문을 준공하였고, 1975년에는 성곽 보수를 완료하였다. 1979년에는 제2차사업의 일환으로, 성 안의 민가 751동의 철거를 추진하여 1984년에 끝냈다. 1992년 이후는 제3차사업으로 성 외곽을 정비하였다. 지금 성 안에 있는 주요 사적과 시설로는 촉석루·국립진주박물관·창렬사·호국사, 그리고 진주성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등이 있다.
한편, 진주에는 다른 어떤 지방보다도 많은 실경산수화 풍의 고지도가 많이 남아 있어 조선시대 진주성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촉석루의 연혁]
촉석루는 진주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탁월한 경관이며, 영남 제일의 명승이다. 진주성 안 남강변에 우뚝한 누각이자 진주성의 지휘소로서 진주시 본성동에 소재하며 일명 남장대 혹은 장원루(壯元樓)라고도 부른다.
고려 고종 24년(1241) 목사 김지대(金之岱)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1322년(충숙왕 8) 목사 안진(安震)이 재건하였다. 그러나 우왕 5년(1379)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자 조선 태종 13년(1413) 목사 권충(權衷)이 세 번째로 다시 세웠다. 이후 성종 22년(1491)에 목사 경임(慶任)이 네 번째, 선조 16년(1583)에 목사 신점(申點)이 다섯 번째, 광해군 10년(1618)에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여섯 번째, 영조 1년(1725) 병사 이태망(李台望)이 일곱 번째로 다시 세웠다. 지금의 촉석루는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의 배려로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중건하였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락집으로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며, 누각의 돌기둥은 창원의 촉석산에서 채석한 것이며, 대들보는 오대산에서 벌목한 것이다. 진주 출신의 문인 하륜(河崙)[1347~1416]의 「촉석성문기」·「촉석루기」를 비롯하여 중수기문과 비문, 그리고 시인묵객의 많은 시문이 오늘에 전한다.
○ 하륜(河崙)의 「촉석성문기(矗石城門記)」: 옛날부터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되풀이되는 것은, 대개 그 하늘 운세의 성함과 쇠퇴함의 이치와 사람 사는 일의 성공과 실패가 서로 인연이 되어 그러한 것이다. 옛사람은 인간으로서의 할 일을 닦음으로써 하늘의 운수에 응하였기 때문에, 도둑떼에 의한 난리가 혹시 일어나더라도 끝내는 능히 우려함이 되지 않게 하였다. 나는 우리 고향의 성(城)에서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내가 옛적 총각이던 시절에 여기서 유학하며 매번 성 둘레 구덩이의 남겨진 빈터를 보았으되 그 오래됨을 알지 못했고, 나이 많은 어른에게 여쭈어 봐도 또한 능히 알 수가 없었다. 이 무렵엔 백성들의 살림집들이 오순도순 즐겁게 모였고, 밥 짓는 연기가 서로 어우러졌었다. 바다로 침입해온 도적떼의 좀도둑질이 비록 어쩌다 가끔 일어났으나 강주 길안(吉岸)의 토벌로도 또한 적을 꺾어 쳐부수기에 넉넉하였다. 합포의 진(鎭)에서 병사를 나누어 서로 구원하면 우레처럼 엄하게 바람같이 몰아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참(城塹)을 수리하는 일을 급한 임무로 알지 않았다. 내가 이미 갓을 쓰고 벼슬에 종사한 지 십여 년인데, 바다 건너 도적떼들이 뭍으로 올라오는 일이 해마다 더욱 늘어만 갔다. 정사년 가을에 조정의 의논이, 국경지대의 방비를 소중히 여겨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 주와 현의 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곧 옛터에 흙으로 쌓았으나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흙담이 무너지니 임무를 맡았던 자가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기미년(1379) 가을에 지금 지밀직이었던 배공(裵公)이 강주의 진장으로 와서, 이곳 강주목의 관리에게 위로부터의 지시사항을 알려 다시 이를 쌓게 하였다. 참좌를 보내어 공사 일을 감독케 하며 흙을 바꾸어 돌로써 쌓게 했는데, 일이 채 반도 못 되어서 왜구에게 함락되었으나 강성군(江城郡)의 산성에 의지하여 고을 사람이 거기서 거처한 바 있었고 도적들의 칼날을 물리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이 비좁고 지세가 높아서 많은 사람을 들여 넣을 수 없고, 또 주(州)의 마을에서 거리가 멀므로 미처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몹시 급작스러울 때는 거기까지 능히 가 닿을 수가 없었다.
왜구가 물러간 뒤에 목사 김공께서 백성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영을 내려 고을의 성을 이제 쌓고 수리하여 마칠 수 있도록 하라 이르니, 듣는 자가 모두 그 일을 하기를 원하였다. 이에 장정들에게 부역을 고르게 하고 몸소 감독하여 며칠이 안 되어 끝나게 되었는데, 성의 둘레가 800보, 높이는 24자가 넘었다. 기이하게 문을 3개 설치하니 서쪽은 의정문(義正門)이라 부르고, 북쪽은 지제문(智濟門)이며, 남쪽은 예화문(禮化門)이라 했는데, 모두 그 위에 다락을 만들었다. 올라가서 사방을 돌아보니, 청천(菁川)[진주를 흐르는 남강의 옛 이름]이 서쪽을 빙 둘렀고 긴 강이 남쪽에 흐르며 品(품)자 모양으로 생긴 못이 동쪽에 벌려 있고, 세 군데 못은 그 북쪽에서 물이 돌아 흘러 모인다. 또 구덩이를 성지(城池) 사이에 파서,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꺾어 또 남쪽으로 가서 강에 이르게 하였다. 형세가 뛰어남이 진실로 성 위의 한 사람이 성 밖의 백 사람을 가히 당해낼 만하였다. 성이 완성되니 왜구가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하여 모든 환경이 믿음직하고 편안하였다.
아! 만드는 어려움이 다시 일으켜 세우는 어려움만 못하고, 시작이 있는 어려움이 더더욱 끝맺음이 있게 하는 어려움만 같지 못한 것인데, 일한 것은 반이면서 공로의 업적은 곱절이 되는 것을 내가 김공에서 보았도다. 공의 휘는 중광(仲光)이니, 고을과 백성을 위한 정무에 힘써서 대체로 덕이 뛰어난 웃어른다운 풍모가 있었다. 일찍이 제주목사가 되었을 때, 곧잘 두 마음을 품고 옳은 것을 따르지 않던 그 지방 습속이 그의 의로움에 감복하였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다스림에 능하다 하여 재상들이 바삐 천거하여 여기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판관이었던 이군 사충(仕忠)도 역시 단정한 사람으로서 김공을 도와 이 성을 완성시켰다. ― 진산 하륜 적음
[원문]
矗石城門記
自古以來 理亂循環 蓋其天數之盛衰 人事之得失 相因而然也 古之人 修人事 以應天數 故寇亂或興 而終莫能爲患也 余於吾鄕之城 有感焉 余昔總角之日 遊學於此每見城塹之遺基 不知其歲月 問之耆老 亦莫能徵 當是時 閭閻熙熙 烟化相望 海寇之鼠竊者 雖或間發 康州吉岸之伐 亦足以摧挫 而合浦之鎭 分兵相救 若雷厲而風驅 然人不知修城塹爲急務 余旣寇 從宦十餘年來 寇之登陸者 歲益深 在丁巳之秋 廷議重邊備 使諸道分理州縣之城 鄕人卽舊基 築以土 不能經久 隨復頹圯 奉使者豈得辭其責 己未秋 今知密直裵公 來鎭康州 移牒牧官 俾復修之 遣參佐督其役易土以石 功未半而寇陷 賴江城郡之山城 一鄕人有所似據 得以却寇鋒然城狹而高 不能容衆 又去州里遠 倉卒勢不能及 寇旣退牧使金公 人民情而今曰 州之城今可畢修矣 聞者咸願爲爲役 於是丁均其役 躬自監督 不日而畢 城周八百步 高三仞 有奇置門三 西曰義正 北曰智濟 南曰禮化 皆樓其上焉 登而四顧則 菁川繞于西 長江奔于南 品字隍列於東 三池匯其北 又開塹於城池間 自西東折又南 以至于江 形勢之勝 固可以一當百焉 城旣成矣 寇不敢近而一境 賴而安 嗚呼 作之之難 不如興復之爲難 有始之難 不如有卒之爲尤難也 事半而功倍者 余於金公見之矣 公諱仲光 爲政務大體 有長者風 嘗爲濟州牧 反則之俗 服其義 及還朝宰相以能理劇擧 故有是任 判官李君仕忠 亦端正人也 助公以成 (見勝覽) 晋山 河崙 記
○ 하륜(河崙)의 「촉석루기(矗石樓記)」: 누정을 짓고 운영해가는 것은 다스리는 자의 여가 활용일 따름이다. 그러나 한 누각의 세움과 황폐한 것으로 한 고을 인심을 알 수 있고, 한 고을 인심으로 말미암아 한 시대의 세도(世道)를 알 수 있다. 그런즉 어찌 하찮은 일이라 하여 함부로 여길 것인가? 내가 이러한 말을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우리 고을 촉석루에서 더욱 믿게 되었다. 누각은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벼랑 위에 있는데 내가 소년 때에 여러 번 올랐던 곳이다. 누의 규모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서 바깥쪽에 벌려져 있다. 마을의 뽕나무와 대나무가 그 사이에 은은하게 비치고 푸른 석벽에 긴 모래톱이 그 곁에 서로 잇닿아 있다. 사람의 기상이 맑고 풍속이 온후하여 농부와 누에치는 아낙네는 일에 부지런하고 아들과 손자는 효도에 그 힘을 다하며, 새들은 울고 날며 물고기와 자라는 헤엄치고 자맥질하며 한 구역의 사물로써 즐거움을 얻는 것까지도 모두 볼 만하다. 또 누각을 이름 지은 뜻을 담암(談庵) 백선생은 “강 가운데에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으로 누 이름을 촉석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누각은 김공이 짓기 시작하였고, 안상헌(安常軒)이 두 번째로 완성하였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한 분들인 까닭에 또 장원루(壯元樓)라는 명칭도 있다. 제목을 붙여 시를 읊는 아름다움으로는 면재 정을보(鄭乙輔) 선생의 배율(排律) 여섯 운(韻)과 상헌 안선생의 장구 사운이 있고, 경운은 설선생의 여섯 절구가 있으며, 이분들의 운을 화답하여 계승한 이는 우곡 정선생, 이재 허선생 같은 분이 있다. 모두 아름다운 작품으로서 선배들의 풍류 있는 문채를 상상해볼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전조 말기에 온갖 법도가 무너지매 변방의 수비 또한 해이해져서 왜구가 침입하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누 또한 불타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하늘이 거룩한 새 왕조를 열어 성신(聖神)이 계승하니, 정치 교화가 이미 밝아져서 은택이 국내에 젖고 위엄이 해외에 떨치니, 전일에 도둑질하던 자가 관문을 두드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여 연달아 공물을 바쳤다. 바닷가 지역에 인구가 다시 빽빽하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늙은이가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경축하기를“오늘날 우리 눈으로 태평세월을 볼 줄을 생각하지 못하였다.”한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은“나의 다스림이 아직도 흡족하지 못하다.”하시어, 매양 교지를 내려 백성을 노역시키는 것을 엄금하므로, 수령으로서 농사와 학교에 관계되는 일 외에는 감히 한 가지 역사도 마음대로 일으키지 못하였다. 이런 중에 고을의 나이 많은 어른인 전 판사 강순(姜順), 전 사간 최복린(崔卜麟) 등이 의논하기를, 용두사는 이 읍을 설치할 때 자리를 봐두었던 곳이요, 촉석루를 두어 한 지방의 뛰어난 경치로 삼아 옛 사람들이 오락으로 손님을 맞아 마음을 즐겁게 하여 혜택이 고을 백성에게 미치도록 했던 것이다. 황폐한 지 오래 되었으나 중건하지 못하니 이는 우리 고을 사람들의 책임이다. 이에 각자 재물을 추렴하고 고을 중으로서 용두사 주지 단영(端永)에게 그 일을 주간하게 하였다. 나는 이것이 임금님께도 들리게 하여 이를 금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니, 그때가 임진년(1412) 12월이었다,
다음 해 판목사 권충 공이 판관 박시결과 함께 고을 어른들의 말을 받아들여 강둑을 수축하여 마을의 오랜 근심을 덜어주더니 열흘이 못 되어 일을 마쳤다. 다음에 누를 짓는 역사에 부족한 것을 도와주기 위하여 놀고 있는 자 수십 명을 불러 모아 힘을 다하게 하니 가을 9월에 이르러 완성하게 되었다. 높은 누가 비로소 새로워져서 훌륭한 경치가 예전과 같았다. 이제 판목사 유담 공과 판관 양시권이 뒤를 이어와서 건물에 붉은 흑색을 칠하고, 또 이를 계기로 누에 올라 살펴보고는 농사짓는 데 필요한 물을 논밭에 댈 것을 괴하여 수차를 만들고 강물을 막는 댐 같은 시설을 쌓았다.
백성을 일으켜 이롭게 하고, 나이 지긋한 고을 어른들은 그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강을 막는 둑 쌓기와 촉석을 새롭게 꾸미고 운영하는 것은 이 모두가 당신이 그려본 계획을 지시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하물며 임금님의 특별한 명을 받아 한 고을이 영광스럽게 빛나는 것이 지극함이라, 몇몇 군자들로 백성을 염려함이 또한 부지런하고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어찌 기록하여 보여줌으로서 자취가 없어지지 않도록 하지 않으리오?”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이것이 다 고을 어른들의 뜻이요, 돌아보건대 내게 무엇이 있겠소? 내 이미 인심 세도로써 기뻐하였고, 또 고을 어른들의 뜻에서도 느낌이 있었소. 삼가 앞뒤의 보고 들은 것을 적는 것이 이러함이요, 또한 홀로 가만히 이 누에 오르는 자가 물가에 풀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나게 하는 마음을 생각하며, 터럭만큼이라도 불인(不仁)함으로써 백성의 삶을 해롭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할 것이요, 밭에 모종이 한창 자라는 것을 보고 천지가 만물을 자라게 하는 것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급하지 않은 일로써 백성의 농사 때를 빼앗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동산 숲에 열매 맺는 것을 보면 천지가 물을 성숙시키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의(義) 아닌 욕심으로 백성의 이익을 침범하지 아니 것을 생각하고, 집 부근에 있는 논밭과 채소밭에 노적이 한창 쌓이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기르는 마음을 생각하여 터럭만큼이라도 법 아닌 생각으로써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 아니하기를 생각할 것이오. 이 마음을 미루어서 범위를 넓혀서 감히 제 몸만이 홀로 즐기지 못하고, 반드시 백성과 함께하고자 한다면 사람들도 모두 세도의 화함과 인심의 즐김이 실상은 임금의 덕이 깊고 두터운 데에서 근원했다는 것을 알아서, 모두 봉인 화의 축하(華封人之祝 : 옛날 중국의 화라고 하는 봉인이 요임금을 축하했던 고사)를 본받고자 원할 것이오. 그런즉 부로들이 간절히 마음 써서 이 누를 부흥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리오. 나도 치사(致仕)할 날이 이미 가까우니, 필마로 시골에 돌아와서 여러 부로와 함께 좋은 시절 좋은 날에 이 누에서 술잔을 들며 시를 읊조려 즐거운 바를 함께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나니, 부로들은 기다려 주시오.”― 헌릉 14년 계사 추 9울 진산 하륜 적음
[원문]
矗石樓記
樓觀經營 爲治者之餘事耳 然一樓之興廢 而一鄕之人心可知矣 因一鄕之人心 而一時之世道可知矣 則亦豈可以餘事而小之哉 予爲此說者久矣 今於吾鄕之矗石樓益信之矣 樓在龍頭寺南石岸之上 予昔少年登望者屢矣 樓之制宏敞軒豁 臨渺茫長江流其下 衆峰列于外 閭閻桑竹隱映乎其間 翠壁長洲聯接其側 人氣以淸 習俗以厚 農夫蠶婦 服其勤孝子慈孫 竭其力 至若禽鳥鳴翔 魚鰲游泳物於一區 而得其所者 俱可觀矣 其名樓之義 則談菴白先生記曰 江之中有石矗矗 故樓名曰矗石 始手於金公 而再成於安常軒 皆壯元也 故又有壯元之名焉 題詠之美 則有勉齋鄭先生之排律六韻 常軒安先生之長句四韻 亦有耕隱偰先生之六絶句和韻而繼之者 有若及菴閔先生 隅谷鄭先生 彛齋許先生皆佳作 前輩之風流文彩 因可想見矣 不幸前朝之季 百度陵夷 邊備亦弛 海寇深入民墜塗炭 樓亦煨燼矣 天啓聖朝 聖神相承 治敎以明 思濡境中 威振海外向之爲寇者 叩關乞降 絡繹以獻琛 濱海之地 人煙再密 斑白之老 酌酒而相慶曰 不圖不日眼見昇平 然上心猶以爲吾治未足 每降敎旨 禁用民力 守令於事 涉濃桑學校之外不敢擅興一役 鄕之父老 前判事姜順 前司諫崔卜麟等 議曰 龍頭寺邑初相地之所置矗石爲一方之勝景 昔之所以奉娛 使臣賓客之心 以迎和氣 而惠及鄕民者也 廢之久不能重新 是吾鄕人之所共爲責也 及各出財 使鄕僧奠香龍頭寺者端永 幹其事 余以此聞于上 得蒙下旨勿禁 歲壬辰十二月 判牧事權公衷 與判官朴施潔採父老之言 修築江防 以除田里積年之患 不十而畢 及於是助其不給召集遊手者 數十輩俾勤其力 至秋九月而告成 危樓聿新 勝觀如舊 今判牧事 柳公淡 判官 梁施權 繼至而赭堊之且因登覽 謀所以灌漑者 造水車築堤堰 以興民利 父老具其始末請於余曰 江防之築 矗石之營皆子之指畫而成 況蒙特旨 榮耀一鄕者全矣 數君子爲民慮亦可謂勤矣 盍爲記以示之泯 余曰此皆由於父老之志 顧余何有爲然 余旣以人心世道爲喜 且於父老之意有感焉 謹書前後之見聞者云 且夫竊惟登是樓者 見汀草之始生 念天地生物之心 思不以一毫不仁之慘 而害民生 見田苗之方長 念天地長物之心 思不以一毫不急之務而奪民時 望園木之始實 念天地成物之心 思不以一毫非義之欲 而侵民利 見場圃之方積 念天地育物之心 思不而一毫非法地斂 而掠民財 推是而擴充之 不敢獨樂於已而 必與民同之則 人皆知道之和 人心之樂 實源於上德之深厚 而皆願效於華封人之祝矣 則父老之拳拳焉 用意而興復者 天 豈偶然哉 余致仕之日 已近 思欲匹馬還鄕 與諸父老 每於良辰勝日 觴詠樓上同樂 其所樂以終餘年 父老其待之 獻陵 十四年 癸巳 秋 九月 晋山 河崙 記
○ 하수일(河受一)의 「촉석루중수기(矗石樓重修記)」 : 유유주(柳柳州)[중국의 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킴]에게서 들으니 “어진 자는 일어나게 하고 어리석은 자는 폐(廢)하게 하는데, 폐한 것을 회복시켜 일으키는 것은 옳은 것이요, 따르고 행하는 것만 익숙한 것은 그릇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나는 명언(名言)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 등왕각(滕王閣)에서 왕홍중(王弘中)을 얻고 악양루(岳陽樓)에서 등자경(藤子京)을 얻어 모두 없어진 것을 일으켜 회복하였다. 이것을 과연 어진 자라 할 것이니 지금은 우리 고을 수령인 신공[이름은 신점, 申點]이 계신다. 촉석(矗石)은 진양의 이름난 누인데, 고려왕조 때는 김중광(金仲光) 공이 그 별가 이사충(李仕忠)과 더불어 처음 시작하여 만들었던 것이다. 그 뒤에 연달아 불타서 없어지곤 하여, 헐리고 다시 세워짐이 무상(無常)하였다. 홍치 4년 신해년(辛亥年, 성종 22년, 1491년)에 이르러 경후(慶侯) 임(任)이 그 별관(別館)인 오치인(吳致仁)과 더불어 또 거듭 수리하였다. 이제 93년이라 세월이 지나가, 들보가 부러지고 기둥이 기울어져서 그대로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외지나 타국에서 온 모든 귀한 손님의 성대한 잔치놀이엔 항상 객사(客舍)를 빌려 썼다. 그러면서도 여러 지방장관이 부임해오고 또 바뀌었으되 모두 다 때와 형편이 맞지 않아 일을 시작하지 못하더니 지금 우리 목민관에 이르러 우리 수령 유공(柳公)과 더불어 이 누각을 새로 세우기로 하고 옛 규모를 잘 회복시키기를 꾀하니, 때는 만력 11년, 계미년 봄 2월이었다.
누(樓)의 제작방식이나 기준은 다섯 칸이요, 대들보가 여섯이며, 너비가 서른여덟 자, 기둥이 모두 쉰 개, 높이가 여덟 자였다. 동편의 것을 청심(淸心)·함옥(函玉)이라 하고, 서쪽의 것을 관수(觀水)·쌍청(雙淸)이라 하였는데, 모두가 이 누(樓)에 두 손 모아 공손히 절하는 것이 마치 천하고 어린 사람이 존귀한 자에게 인사하는 것과 같다. 옛 제작방식이나 기준은 아래위의 기둥이 자못 낮은 편이고 굵지 못했으나, 지금은 높고 또 웅장하다. 높게 한 것은 밝게 하고자 함이요, 웅장하게 만든 것은 튼튼하고 견고하게 하고자 한 것이며, 그 나머지 나지막한 담은 넓게 하고 자리는 길게 하였으며, 합벽(闔闢: 열고 닫는 장치들)은 가로 세로에 크고 둥글게 하여 절도에 맞게 했으니, 한 결 같이 그 옛것을 따랐다.
들보 위의 짧은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는 높고 꽉 짜여 둘레가 견고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은 그 전의 제작방식보다 백배나 더하여, 마침내 빼어난 경관을 새롭게 하고 빛을 더하니, 산은 더욱 높아 보이고 물도 더욱 맑게 보인다. 무릇 널찍하고 높으며 앞이 툭 트이고 물이 가득히 넘쳐흐름이 고리처럼 빛 둘러 있어 해와 별이 임하여―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대하여―굽어보며 바람과 비가 산뜻하고 깨끗하며 쌀쌀하기도 하다. 눈으로 꾀하고 귀로 꾀하여 두드러지게 빼어난 것에다 기이한 것을 본뜨고 교묘한 것을 다투어 바쳤으니, 모두가 처음 열리는 것을 더한 것 같다. 이 해 여름 4월에 공사가 끝나고 이어 8월 기미(己未)에 방백(方伯:관찰사) 및 우리 목민관이 관리의 무리와 참석한 선비들을 거느리고 여기에 올라와 공사의 완성잔치를 베풀었다. 행렬 앞에 세우는 창이 달린 깃발과 가마와 수레 등에 둘러친 휘장이 촘촘하게 늘어서 날리듯 펄럭이고, 종과 북, 생황(笙簧)과 피리가 마치 뭇 새들이 지저귀는듯하여 우레 소리를 비웃는 듯하였다. 낮에는 그 경치를 다 보고 이어 밤에 기쁨을 다하다가 놀이로써 끝났다.
왕자(王子)가 등왕각을 만들 때 영(令)을 내림이 올바르고 사람이 잘 모였으며, 등자(滕子)가 악양루(岳陽樓)를 만들 때 다스림이 막힘이 없고 사람들이 화목함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고을 지도자가 율법이나 규칙을 알지 못해 홀로 뜰과 출입구 사이에서처럼 좁은 범위를 닦지 못했는가. 또 우리 목민관(牧民官)의 다스림이 홀로 등자와 더불어 견주더라도 자신을 사양하고 그를 내세울 만큼 부족하였겠는가. 우리 고을 백성들 또한 화목하지 않고서도 잘 모였겠는가.
내가 한범(韓范: 한유, 韓愈와 범중엄, 范仲淹)과 같은 글 솜씨가 없기 때문에 이 장한 일을 들추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큰 이름을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을 때까지 뻗어가게 할 수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할 것이다. 목민관 신공은 서원(西原) 사람이며 이름은 점(點), 자(字)는 성여(聖與)요, 판관인 김원룡(金元龍) 공(公)과 서로 협력하여 이 누(樓)를 이루었나니 시(詩)로써 이를 엮는다.
진주의 빼어난 경치는 촉석(矗石)이 제일이니,
터 잡아 규모 정하고 기초 다져 집짓기를 비롯함은 고려로부터 이어왔네.
임금님 사신 오면 여기서 말씀 듣고 여기서 예를 올리며
손님과 잔치할 때 여기서 웃고 즐기고 여기서 말씀들을 나누었네.
그 쓰임새 아주 커서 구경하고 노는 것만이 아니었지.
우리에게 덕을 베풀어 온 목관(牧官)들께서 쓸모없이 부서진 것을 이어받아 고치니.
지난번 홍치연간에 경후(慶侯)께서 거듭 새롭게 고친 지 손꼽아 헤어보니 구십삼 년 되었다네.
세월이 쌓여지고 해가 바뀜에 대들보와 집이 기울어져 우리 목민관이 새로 짓고자 있는 힘을 다 쏟았고
방백들 명을 받아 애써 이어 행하였네.
우리 후(侯)가 말씀하되, “너희 장인(匠人)들은 너희 재주 다 부리고, 옛분들 본을 따서 제각기 공을 펴라”하셨네.
온 백성의 모든 재목, 우뢰처럼 힘쓰고 바람같이 몰려와서 안전하게 흐르도록 높은 방축 쌓이었고, 넓고 평평한 길을 내어 수삼 차(數三 次) 흙 바르고 저것은 도끼질, 저것은 톱질하니 얼마 아니 걸려서 이루었도다.
크디크고, 넓디넓고, 날개 활짝 편 듯, 질서정연하구나.
대숲은 빽빽하고 소나무 무성하니 새가 깃을 펴고 나래짓하듯 남으로 기나긴 강물이 있어 그 흐름 파도처럼 출렁이네
방백(方伯)들이 와서 놀아 마치 무지개 깃털 모양과 용무늬가 절하고 노래하고 또한 춤추는 듯, 그 즐거움은 밝기도 밝네.
서쪽에 우러러볼 산이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았고, 우리 높으신 님은 잔치에 오셨으니 좋은 손님들이 자리에 가득 찼네.
취하고 배불러서 북을 치니 소리도 둥둥, 흐르는 물엔 고기 뛰고 언덕에는 나는 것이 모여 있네.
나라 사람들끼리 아뢰는 말이 우리 목민관은 우리 부모요, 원하옵건대 즐거움을 말한다면 우리를 갓난애 같이 여기고 사랑하소서.
현인의 전하는 책에도 있나니, 어진 사람은 백성을 사랑하는 일을 즐거워한다 하였으니 놀면서 즐거움을 백성에게 주어진 사물의 도리나 이치가 되시니,
이제 보잘 것 없는 나의 축복 기도를 바침이 아무리 장황하게 늘어놓는 셈이 되더라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만력 십일년(1583) 계미 춘 2월 진양(晋陽) 하수일(河受一) 적음
[원문]
矗石樓重修記
聞諸柳柳州 賢者之興 而愚者之廢 廢而復之爲是 習而循之爲非 吾以爲名言 在古則於滕王閣 得王弘中 岳陽樓得滕子京 咸擧其廢者而復之 玆果爲賢者歟 在今則我侯申公有之矣 矗石晋陽之名樓也 在麗朝 金公仲光 與其別駕李仕忠始成而作之 厥后連爲焚蕩 廢興無常 至弘治四年辛亥 慶侯 糸任與其別官吳致仁 又重修 今九十有三載 歲月旣久 棟絶柱欹 不克以居 由是
凡大賓旅大燕遊 常寓于客舍 然而歷累侯 咸以時屈 莫能擧 及至我侯與方伯柳公 謀新斯樓 克恢舊規 時萬曆十一年癸未春二月也 樓制五間棟凡六 闊三十有八尺 柱凡五十 高一仞 東爲淸心涵玉 西爲觀水雙淸 皆拱揖斯樓 若賤幼者之朝尊貴也 舊制上下柱頭頗卑弱 今則旣高且壯高欲其明 壯欲其高 其餘閈宏筵尋 闔闢縱橫 奐輪而合度者 一倣其故 欂簬樑桷峻整 周重堅固 而不可動者 百倍於前 制度聿新 勝觀增光 山益高水益淸 凡宏敞軒豁浮游瀰漫 回環日星臨瞰 風雨粲然冷然 目謀耳謀之勝 爭效奇獻巧 咸若有加闢之者 是歲夏四月工旣訖 乃八月己未 方伯及我侯 率僚屬賓士登玆以落 棨戟幨帷 森列飛揚 鐘鼓笙竽 噭噪嘲轟 晝窮其觀 又 繼以夜極歡以罷於戱 王子之爲滕王也 令修而人得焉 滕子之爲岳陽也 政通而人和焉 則不知我方伯之令 獨不修於庭戶之間乎 我侯之政 獨與滕子相推讓乎 我邑之民 亦不知而得戶 吾無韓范筆力 無以揚盛擧 而垂鴻聲於不朽也 申侯西原人 名點字聖與 判官金公元龍相協力以成 糸之以詩曰.
維晋之勝 矗石第一 度土經始 越自麗室 王有使臣 爰紹爰禮 賓有燕好 爰笑爰語 厥用孔大 匪專觀游 肆我來侯 廢用繼修 往在弘治 慶侯重新 屈指于今 九十三春 歲積紀踰 棟宇摧傾 我侯欲新 慮以擧嬴 方伯有命 克承克行 我侯曰咨 汝匠汝工 制用舊烈 各奏爾功 四民輦材 雷厲風驅 安流瞿塘 坦道三塗 斧彼鉅彼 成之不日 奕奕渠渠 翼翼秩秩 竹苞松茂 鳥革翬翔 南有長江 其流湯湯 方伯來游 析羽龍章 式歌且舞 其樂陽陽 西有崇山 峻極于天 我侯來宴 嘉賓滿筵 旣醉以飽 伐鼓淵淵 流有跳鱗 岸有集羽 邦人相告 侯我父母 願言之樂 同我赤子 於傳有之 賢者樂此 庶度遊豫 納民軌物 迂生獻禱 無愧張匹
萬曆 十一年 癸未 春 二月
晋陽 河受一 記
○ 정식(鄭栻)의 「촉석루중수기(矗石樓重修記)」 : 영남 땅은 산과 물의 지역이다. 촉석루가 홀로 제일이며 누(樓)가 동남에서 그에 맞설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빼어나다는 것은 참으로 마땅하다. 돌벼랑이 높이 솟아 있고 언덕에 대밭이 쓸쓸하게 드문드문하며, 두 물이 중간에 갈라져 있고 기이한 바위가 층층으로 깔려 있다. 이것은 황강(黃江)[중국 양자강 연변에 위치한 옛날 군사상의 요충지로 유명한 곳]의 절벽과 백로(白鷺)의 모래섬이나 상강(湘江)[중국의 동정호에 연결된 유명한 강]의 이름다운 천석(泉石)과 더불어 그 낫고 못함이 어떠한지를 가리기 힘들다. 그러나 누각 가운데서 힘센 장사가 제 한 몸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죽은 충성이라든가 바위 위에서 이름난 기생이 도적을 죽이고 죽은 의로운 절개는 또한 악양(岳陽)이나 황학(黃鶴)에서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위엄 있고 당당한 아름다운 풍속은 오랜 세월에 으뜸이로다! 날아갈 듯 한 들보와 그림을 그린 기둥과 조각한 난간, 수놓은 지게문(다락마루 입구의 외짝 문을 가리킴)은 머리에 쓰는 망건 앞 부분에 별처럼 장식품을 단 갓쓴 이로 하여금 다락에 올라와서 구경하느라 되돌아가기를 잊어버리게 할 뿐만 아니라, 넓고 푸른 물결, 작은 배, 그리고 달뜨는 섬과 안개 낀 물기슭은 다만 풍류를 아는 선비와 도롱이 걸친 늙은이(낚시질 하는 자)가 즐겁게 빠져들어 놀거나 시를 읊조리며 노니는 곳일 뿐만은 아니다.
돌아보건대, 하늘이 베푼 땅이 험악하기를 이와 같이 웅장한 것이 진실로 친하고 보배로운 산하(山河)라고 할 것이다. 성과 군사 요지의 원수(元帥)가 거처하며 여러 보좌관들과 더불어 혹은 여기서 술잔을 들고 거문고 타며 노래하거나 혹은 여기서 무술을 강의하고 덕을 살피게도 한다. 남쪽으로 넓은 물이 세차게 흐르며 보이지 않도록 사이에 가로막아 보호해주는 땅이니, 가히 그것으로써 안개와 이슬의 뛰어난 경치나 물과 돌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깝도다! 생각해보면 지나간 임진년의 난리 통에 일어난 병화에도 다행히 흉하게 타서 허물어지는 근심은 면하였으나 이를 다시 수리하여 오래 걸린 것은, 기둥과 마룻대가 기울어지고 단청 칠이 더럽게 벗겨져서 누각이 크고 넓으며 아름답게 지어진 것이 뒷날에 옛 모습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더구나 고을 사람들이 손님으로 다녀간 지도 이미 백여 년이 지나 옛 모습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으며, 힘은 크게 드는데 경비가 말라서 수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갑진년(1724년) 정원 어느 날, 병상국(兵相國) 이태망 공이 안절사(按節使)로 남쪽에 오게 되니 고래가 물결을 일으키는 듯 한 난리도 없었고 전쟁 때 사용할 무기와 장막도 무사하여 오직 낡아서 부서진 것을 수선하는 것으로 힘썼다. 이 누가 부서진 것을 깊이 아깝게 여기고는 우후 박황 공과 더불어 돈과 재물을 모으고 힘을 쌓아 재목감은 운반하는 지혜를 짜서 기둥과 마룻대와 널판 난간이 썩어서 검게 되고 꺾인 것,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 것이 흐리터분하게 뒤엉켜 선명하지 않은 것을 바꾸어 새롭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여기에 안개 낀 경치와 이슬이 빛깔을 보태고 바람과 달빛이 채색(彩色)을 더하였으며, (물속에선) 이무기가 뒤척이듯, 고래가 헤엄치듯, 또한 필시 강산의 기이한 도움이 기뻐서 들에 일하는 늙은이와 거리에 뛰노는 아이들까지 상국(相國 : 이태망공을 가리킴)의 공로를 누가 외워 말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봉황(鳳凰)의 지세나 풍경이 뛰어남이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것이나, 적선(謫仙)[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별칭]의 시 읊음은 그저 시인의 멋대로 뇌까린 말에 불과한 것이며, 적벽(赤壁)의 풍광이 즐겁다면 즐거우나 소동파의 적벽에서 뱃놀이가 사물의 밖에서 멀리 생각한 것이 지나지 않는다. 어찌 나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을 묘책의 한 가지로 도움 되지 않겠는가.
뒷날 이 누에 오르는 이는 적선(이태백)과 소자(蘇子 : 소식, 蘇軾)의 낭만적인 흥취로 사물을 깨닫는 방법을 본받지 말고, 반드시 범문정의 ‘악양루’라는 글처럼 천하의 근심을 먼저 하여 그 근심을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하여 그 즐거움을 즐긴다면, 이 누가 썩지 아니할 것이며 나라가 귀중하게 다루어지리라.
영조 원년(1725) 을사 월 일 수양(首陽) 정식(鄭栻) 적음
[원문]
矗石樓重修記
嶺之南山水區也 矗石樓獨爲第一 樓之擅勝於東南固宜矣 石壁崢嶸 案篁簫疎 二水中分 奇巖層鋪 此則與黃岡之壁 白鷺山洲 湘江泉石之勝 不知其優劣如何 然樓中壯士妄身殉國之忠 巖上名妓殺賊死義之節 則亦岳陽黃鶴之未曾聞也 凜然美風 千古竪髮 飛甍畵棟 彫欄繡戶 不但爲使星冠蓋登樓忘返 滄波小艇 月嶼烟汀 不但爲韻士簑翁之耽遊咏翶 顧其天設地險 若是雄且壯 則眞 所謂親寶山河 而城而鎭之元帥居之 與幕僚諸公 或盃酒琴歌於斯 或講武觀德於斯 以爲南蕩扞蔽之地則 不可以烟露之勝 水石之美論者也 惜乎 粵以壬辰兵燹之間 幸免於凶炬蕩殘之患 而重修此久則棟樑領側 丹丹隻汚脫 輪奐之制 非後有爲舊之楊則 州人過客之旣盡 百有餘年 而力巨財凅 無以修繕 歲甲辰月正之日 兵相國 李公台望 按節以南 鯨波不興 金刃 帳無事 惟以修擧廢墜爲務 而深惜斯樓之頹破 與虞侯朴公璜 鳩財畜力 同功運智 棟樑板襤之腐黑境折者 靑黃赤白之漫漶不鮮者無不易而新之 烟露增色 風月聳彩 舞蛟遊鯨 亦必喜江山之奇助而野臾街童 孰不誦相國之偉功哉 然鳳凰形勝 美則美矣 而謫仙之咏不過詩人幔語 赤壁風光 樂則樂矣 而蘇子之遊 不過物外遐想 焉有所補益於廟籌之爲一哉 後之登斯樓者 勿以謫仙蘇子之興莫效自得 而必如范文正之先天下之憂 而憂其憂 後天下之樂 而樂其樂 則樓之不朽而國斯重矣
英祖 元年 乙巳 月 日
首陽 鄭栻 記
○ 성환혁(成煥赫)의 「촉석루중건기(矗石樓重建記)」 : 영남에는 산이며 강이며 누대(樓臺)의 빼어난 경치가 많은데, 진주가 그 제일로 이름이 온 나라에 드러남은 촉석루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누각은 고을 성터 위에 있으니 성지(城址)로부터 (서쪽편) 가까이 높은 언덕이 솟아 동으로 달려가다가 갑자기 끊어지고 다시 일어나 용머리와 같은 것이 있으니, 그 앞이 곧 누(樓)가 있는 곳인데 옛날부터 용머리언덕이라고 일러왔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멀고 가까운 산들이 이를 감싸고 보호하는 형세를 지녔는데, 높이 북쪽에 (그 산줄기가) 다다른 것은 그 이름이 비봉산이다. 물이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여 이를 둘러싼 모양이 천천히 동쪽으로 흘러가는 것은 그 이름이 남강이다. 강 언덕에 덮인 대숲이 무성하게 우거지고 서쪽과 남쪽은 넓은 들판으로 밭이랑이 그림처럼 펼쳐졌고, 절벽의 풀이며 나무며 물기슭의 안개와 높은 그 경치가 아침저녁으로 변하여 봄과 가을엔 달라 보이니, 이것은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베풀어 천년만년토록 하나의 위대한 절경(絶境)을 이루어, 이로써 예나 지금이나 곳곳에서 몰려드는 나그네의 유람거리로써 이바지하게 한다. 그래서 영남 제일가는 경치로서의 이름이 온 나라에 들먹여지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대개 누(樓)가 창립된 연대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우황 5년 기미년에 한번 섬나라 오랑캐(일본을 말함)에 의해 불살라졌는데, 목사(牧使) 김중광이 다시 세웠다. 조선 선조 26년 계사에 다시금 섬나라 도적에게 불살라져, 병사(兵使) 남이홍이 이를 중건하였다. 그 뒤에 조정의 명령으로 여러 번 수리하였으니, 이는 『여지승람(輿地勝覽)』과 『진양지(晋陽誌)』에 기록되어 내려오는 바이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3년 만인 경인년에 남과 북의 내전(內戰, 6·25전쟁, 한국전쟁)으로 불행히 또 불태워져버렸다가 이제 또 다행히 중건하여 완성을 보았다. 아아, 슬프다! 누각이 매양 한번 파괴되어 없어졌다가 새로 지어짐은 그때그때 나라를 돌보는 데 있어 잘 다스려지던 세상과 어지러운 세상을 미루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조정의 신하 및 방백(方伯 : 관찰사)에서부터 일반 고을의 나이 든 어른까지도 이 다락에서 평안한 세상을 노래할 때는 누각도 나라도 아무 근심이 없었다가 왜구가 침입해오면 성이 파괴되고 사람이 죽으매 따라서 폐허가 되곤 하였다.
이와 같은 것이 다 그때그때 정치의 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칠팔백년 사이에 무릇 흥망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홀로 이 누만 그런 게 아니다. 비록 그러하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흥함과 망함은 하늘의 이치에 벗어날 수가 없으므로 정사(政事)가 한번 잘 다스려지면 어지러움이 오고, 만물이 한번 황폐해지면 흥하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어지러우매 평화를 생각하고 피폐해지매 흥함을 생각함은 인간의 감정이 다 같은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일은 지나가고 처지와형편만 남게 되니, 그 형편이 뒤집혀 지난 일을 비추어본다면 분하고 못마땅하여 회복할 계책(計策)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누각이 예로부터 여러 번 폐하고 여러 번 흥함이 있었던 까닭이며, 또 오늘날에 이를 새로 중건하여 다시 보도록 한 것이다. 옛날 왕찬(王粲)이 누각에 올라 지은 시 「등루부(登樓賦)」에 이르기를, “마땅히 어짊과 덕(德)을 근본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가 한번 세상을 평정(平定)하기를 바람이여! 높은 언덕에 의지하여 내 힘을 달려 보리로다.”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감정이 또한 같은 것이다. 내가 이제 이 누각에 오르매 이와 같이 바라는 바가 없지 않음으로써 미루어보면 세상 사람들도 또한 다 나와 같음이 있을 것인즉, 오늘날 정권을 잡은 자는 그 마땅히 정치를 한번 새롭게 함을 이 누각과 같이 함을 생각할지어다.
이 중건사업을 사단법인 진주고적보존회의 주관으로 정부 및 본도(本道)의 적극적인 후원과 거족적인 협찬을 얻어 대한민국 건국 9년 병신년 5월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재료는 곳곳에서 가져오되 대들보감은 강원도 설악산에서 가져오고, 크고 작은 돌들을 구하되 주춧돌은 창원의 명곡산에서 내어 와서 갈고 다듬기를 날마다 계속하여 5년째인 경자년 봄에 마쳤다. 이로써 그 해 10월, 보존회에서 국내의 유지 및 여러 인사들을 모아 공사를 완성하니 그 참으로 거룩한 일이었다. 대개 이 일을 전후하여 역할을 맡아본 사람은 보존회 임원 여러분이요, 이제 나 또한 이 기문(記文)을 지어 여기 참여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960년) 봄, 창산 성환혁 적음
[원문]
矗石樓重建記
嶺之南號多山水樓臺之勝 而晋州爲其第一名聞於國中 以有矗石樓故也 樓在州城址上 自城址而不一里 有獨岡透迤 東鶖乍斷復起 若龍之頭 止其前 卽爲樓之境 而古所稱龍頭埠者也 由此以望之 山之或近或遠 爲此擁護之勢 而高以北臨者 其名飛鳳 水之若東若放 爲此繞圍之態 而緩以東流者 其名藍江 江之岸被之以竹 極茂翳 西南則曠野四O 參差如畵 而至崖壁草樹汀洲 烟霞其景狀 朝暮變化而春秋不同 觀是眞天造地設 閱千萬歲之一大絶境 以資今古 四方人客之所遊賞讌喜 宜其爲嶺南第一形勝 而名聞於國中者也 蓋樓之刱立 固莫得知其詳 而在高麗禑王五年己未 一火㪍於海寇而牧使金仲光 再建之 李朝宣祖二十六年癸巳 再火㪍於島賊而兵使南以興 重建之 其後以朝令 又屢爲修治之 此其輿地勝覽 又晋陽誌之所紀傳者也 逮夫大韓民國三年(檀紀四二八三年)庚寅有南北之內鬨 不幸而又爲燬燼 而今又幸 而得建築以成焉 嗚呼 樓之每一廢興 時政之治亂固可知矣 方其自朝士方伯 達閭閻父老 共此登臨以安昇平之樂 而樓國無恙 及至寇賊之入城 破人止而樓隨爲墟 其若是者皆由時政治與亂之故 而致之矣 然則其上下七八百年之間 凡爲廢興者 何限數而獨玆樓而已哉 雖然 治亂廢興 與天理之不可無故 政未有治而不亂 物未有廢而不興也 亂而思治 廢而思興 人情之所同 然故 事過境存 境反映事則莫不慨然爲回復之計 是樓之自古有屢廢屢興 而又有今日之一新之 以復厥觀者也 昔王粲登樓 賦有曰冀王道之一平兮 高衢而聘力 古今人情大牴亦同矣 余之今登是樓 不能無斯之冀 而推以知國人亦皆有同於余者則 今之秉政者 其宜思爲治之 一新 如斯樓之爲者哉 是役之發議 自社團法人晋州古蹟保存會 而及道與國 贊同之 出貲亦如之 役始於民國九年丙申五月 材取其遠近 而樑木則出於江原之雪岳 石取其小大 而柱礎則出於昌原之明谷 運輸礱斷日尋月屬 越五年庚子春告訖 以其年冬 十月 日 又自保存會 會國內有志諸人士 宴其上而落之 吁其感矣哉 蓋前後 其役者 保存會任員諸公 而今又以記屬余 余辭不獲 迺書之如此焉
歲庚子小春節
昌山 成煥赫 記
○ 김황(金榥)의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문(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文)」: 촉석루 앞에 있는 비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대부분이 왜적에게 짓밟히고, 백성을 보호해야 할 관리들은 도피한 상태에서 경상우도 초유사로 진주에 당도한 김성일이 피폐해진 진주성 촉석루에 올라 조종도·이로 등과 함께 적에게 침탈당한 국토를 회복할 것을 맹서하면서 읊은 시를 기념한 비석이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선조 임진년 5월에 문충공 학봉 김성일은 영남초유사로 진양성에 다다라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와 정의공 송암 이로와 함께 촉석루에 오르다. 때는 왜란으로 강토에 선지피 낭자하니 벼슬아치는 모두 달아나고 군사와 백성은 흩어졌다. 성 안에 텅 비어 쓸쓸하고 강물만 예대로 아득히 흐르는데 멀리 눈을 들어 조국의 산하를 바라보니 오직 슬프고 분함에 마음 저리어 조공과 이공은 초유사 김공의 손을 잡고삶이 차라리 욕되도다. 강물에 몸을 던져 한을 씻자.하였으나, 학봉은 짐짓 잠시의 괴로움을 잊을 뿐이라며, 한은 천추에 씻지 못하리니 오직 한 번뿐인 장부의 죽음을 허술히 하랴, 여기 푸른 물굽이 상기 뜻있어 흐르거늘 남은 목숨은 더욱 원수 앞에 질기리니, 이 유서 깊은 터전을 지켜 나라에 갚으리라. 분연히 맹세하여 술 한 잔 높이 들고 시 한 수를 읊으니. “촉석루 삼장사는 잔을 들고 굽어 볼 제 뜻 있어 흐르는 물 웃는 가슴 미어지다. 세월도 강물이거니 넋은 길이 남으리라.” 이 시는 뒤에 순찰사로 부임한 오공 숙이 새겨 높이 현판으로 달았으니, 이로써 이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 되어 후인들이 일컬어 촉석루 삼장사라 하였다. 세 현자의 자세한 내력은 각기 그 문집과 역사 기록에 남았으니 여기 다만 이 한 가지 사실만을 돌에 새겨서 촉석루 곁에 세우고 지나는 나그네로 하여금 발을 멈추게 하니, 때는 임진년으로부터 삼백 예순 아홉 해가 지난 뒤의 일이다.
김황 지음
최재호 새기고, 허민 씀
[원문]
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文
宣祖壬辰五月 鶴峯金文忠公 誠一 以嶺南招諭使 來到晋州 與大笑軒趙忠毅公 宗道 松巖李貞義公 魯 同上矗石樓 時倭亂方棘 官守皆逃 軍民不集 城中寥寥 江水茫茫 擧目山河 不勝悲원 趙李二公 欲執手投江鶴峯以爲徒死無益 死亦非晩 吾非畏死者 당所否者 有如此水 遂把酒吟 詩曰 矗石樓中三壯士 一盃笑指長江水 長江之水流滔滔 波不渴兮魂不死 巡使吳公 숙刻詩揭板以識其事 後人由是稱矗石樓三壯士 三賢始終履歷各有文集 及諸公私史乘 今只서此一事 刻石樓傍以示衆觀 時壬辰後三百六十九年也
金榥 撰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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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7 | [정의] 수정 | '중안초등학교'를 '진주초등학교'로 수정 |
2011.08.16 |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 1) 이후 성종 22년(1491)에 목사 경임(慶任)이 4건, 선조 16년(1583)에 목사 신점(申點)이 5건, 광해군 10년(1618)에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6건, ->이후 성종 22년(1491)에 목사 경임(慶任)이 네 번째, 선조 16년(1583)에 목사 신점(申點)이 다섯 번째, 광해군 10년(1618)에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여섯 번째, 2) 김황(金楻)의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문(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文) ->김황(金榥)의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문(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