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4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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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문안식 |
[정의]
918년에서 1392년까지 고려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역사.
[개설]
화순 지역은 고려 전기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못한 곳이었으나, 인종 때에 이르러 능성현에 현령이 파견되고, 고려 말기에 동복과 화순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주현(州縣)으로 변모하였다.
[건국 초기 군현 체제의 개편]
통일 신라 후기에 들어서면서 각지에서 호족들이 중앙 정권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면서 후삼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918년 신숭겸과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고려가 건국한 918년부터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까지 약 20년의 세월 동안 전라남도는 고려와 후백제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었다. 화순 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내륙 지역은 후백제에 속해 있었으나, 936년 후백제가 멸망하며 자연히 고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고려는 통일을 달성한 3년 후인 940년(태조 23) 군현 개편에 나섰다. 전국 49곳의 군현 가운데 29곳이 주(州)로 승격되었고, 8개 군현이 부(府)로 승격되었다. 군과 현을 대신하여 주(州)·부(府)로의 승격이 개편의 주축을 이루었고, 5진(鎭)이 별도로 설치되었다. 군사적 요충지에 주를 설치하고, 통일 전쟁 수행 시의 전략적 가치나 귀부한 호족들의 공로 및 세력의 크기를 고려하여 부를 설치하였다. 진은 국경 수비를 위해 변경 지역에 두었다. 전라남도에서는 신라 경덕왕 때 개명된 승평군(昇平郡)과 금산군(錦山郡)을 각각 승주(昇州)와 나주(羅州)로 승격하였다. 이는 승주와 나주의 호족 세력들이 왕건의 통일 과정에서 적극 협조한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경우 통일 신라 때에 설치된 능성군[현 화순군 능주면 일대], 여미현[현 화순군 화순읍 일대], 동복현[현 화순군 동복면 일대]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능성군은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는 등 위축을 면치 못하였다. 능성군의 속현이던 부리현은 복성현으로 이름을 바꾸고 보성군에 속하게 되었으며, 동복현 역시 보성군에 속하게 되었다. 여미현은 화순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라도의 형성과 화순 지역의 추이]
고려 중앙 정부가 화순 지역을 비롯한 전라남도 일원에 지방관을 파견한 것은 성종과 현종 때에 걸쳐 지방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한 이후이었다. 983년(성종 2)에 처음으로 전국에 12목(牧)이 설치되면서 금유(今有)·조장(租藏) 등이 파견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12목을 폐지하고 12절도사 체제로 바꾸었다. 성종은 절도사 체제를 바탕으로 지방 호족 세력을 통제하고 순찰 기능의 강화를 통해 집권화를 도모하기 위해 10도제를 실시하였다.
전라남도 지역에는 해양도(海陽道)가 설치되었는데 나주·광주·정주(靜州)[현 전라남도 영광군]·승주·패주(貝州)[현 전라남도 보성군]·담주(潭州)[현 전라남도 담양군]·낭주(郎州)[현 전라남도 영암군] 등으로 구성되었다. 해양도는 14주 62현으로 편제되었는데, 화순 지역에는 능성현과 동복현, 화순현이 있었다.
고려의 지방 제도는 현종 때 다시 개편되어 지방 제도의 기본 구조를 완성하였다. 이는 『고려사(高麗史)』 지리지가 1018년(현종 9)의 지방 제도를 기준으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그러나 현종 대의 지방 제도 정비는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즉위 초부터 이루어진 점진적인 개편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전라남도 지역의 경우 승주는 강등되어 승평군이 되었고, 나주만이 목(牧)으로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또한 강남도(江南道)와 해양도(海陽道)를 합하여 전주와 나주의 이름을 한자씩 취하여 전라도로 부르게 되었다. 화순현과 능성현은 나주목에 속하였고, 동복현은 보성군의 관할 아래에 놓였다.
그러나 화순현을 비롯한 화순 지역에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의 지방 제도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였지만, 동시에 신라 말 고려 초 호족들의 지배 영역을 토대로 속군(屬郡) 및 속현(屬縣) 체제를 근간으로 하였다.
영군(領郡)과 속군, 속현의 관계는 읍사(邑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읍사는 모든 주·부·군·현과 향·소·부곡에 있는 지방 통치 조직을 말하는데, 영군의 장리가 속군의 현리들을 통괄하면서 지방 통치를 하고 중앙과의 연계를 맺었다. 고려 시대 영군의 속군 및 속현 지배는 주현의 향리가 중심이 되었다. 중앙 정부는 수령을 파견하여 지방의 향리를 장악함으로써 제반 행정을 처리하였다.
[현령 및 감무의 파견]
화순 지역은 고려 시대 전기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아 토착 세력인 향리의 지배에 놓여 있었다. 현종 때 토착 세력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덕종과 정종을 거쳐 문종 때에 제도적인 보완이 이루어졌다.
고려의 지방 제도는 감무(監務)의 파견으로 인해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고려 중앙 정부는 예종 원년(1106)부터 중앙에서 정식으로 관리를 파견하지 못했던 속군현과 향(鄕)·소(所)·부곡(部曲)·장(莊)·처(處) 등에 감무를 파견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감무의 파견은 원 간섭기에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고려 말인 공양왕 대 이르러 다시 큰 규모로 이루어졌다.
감무의 파견은 공부(貢賦)와 조세 등의 차역(差役)이나 지방관에 대한 공궤(供饋) 등의 부담을 감당할 만한 재정 능력이 충족될 수 있을 때에 가능하였다. 감무의 파견은 속현과 달리 하나의 군·현 단위로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군현이 다수 존재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성장을 의미한다. 지방 사회의 성장은 고려 중기 이후 진전(陳田)과 산전(山田)의 개발, 신종자의 보급과 수리 시설의 확대 등 농업 기술의 발전을 통해 가능하였다.
그러나 감무가 파견되었다고 해서 고려 시대 지방 제도의 특징이었던 영속 관계가 곧바로 해체되지는 않았다. 고려 전기는 말할 것도 없이 고려 후기까지도 지방관이 파견된 지역보다는 그렇지 않은 지역이 훨씬 많았다. 고려의 중앙 정부는 현령과 감무를 엄격히 구분하여 현령관을 파견하였을 때는 영현으로 승격시켰으나, 감무를 파견하였을 때에는 여전히 속군이나 속현으로 취급하였다.
전라남도 화순 지역은 1143년(인종 21) 능성현에 현령이 파견되면서 주현으로 편제되어 나주목의 속현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시기 화순현과 동복현은 현령을 대신하여 감무가 파견되었다. 화순현은 능성현에 현령이 파견된 후 나주목을 대신하여 능성현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면 화순현에도 감무가 파견되었는데, 1390년(공양왕 2)에 화순 감무가 남평 감무를 겸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복현은 승려 조염(祖琰)의 고향이라 하여 감무(監務)가 파견되어 속현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동복현과 화순현에 현령이 파견되어 주현으로 승격한 것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였다.
또한 고려 시대 화순 지역에는 특별 행정 구역이었던 2곳의 소(所)와 1곳의 부곡(部曲)이 존재하였다. 와촌소[현 화순군 백아면 와천리]와 품평소[현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품평리], 율촌 부곡[현 화순군 청풍면 세청리]이 그것이다.
[주요 성씨]
고려 시대 능성현 지역의 토성으로는 구(具)·정(鄭)·문(文)·조(曺)·채(蔡)·주(朱)·강(姜)[진주]·김(金) 씨 등이 있다고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동복현의 토성은 오(吳)·성(成)·선(宣)·화(和)·지(池)·김(金) 씨 등이 있었고, 화순현에는 배(裵)·최(崔)·오(吳)·윤(尹)·하(河)·박(朴)[순천]·김(金)[무진] 씨 등이 대표적인 토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