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3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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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33-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범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0년 4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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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4년 5월 17일 - 석송3·1만세유적지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9호에서 공주시 기념물로 변경 |
소재지 | 석송3·1만세유적지 -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33-2![]() |
성격 | 기념물|유적지 |
소유자 | 석송만세운동기념보존사업회 |
관리자 | 석송만세운동기념보존사업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공주시 기념물 |
[정의]
1919년 4월 1일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벌어진 장소.
[개설]
1919년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는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정안면에서도 여러 인물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전국에서 일어나는 만세 운동의 소식을 듣고 석송리를 비롯한 주변 마을 사람 수백 명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석송3·1만세유적지는 2010년 4월 15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기념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변천]
정안면의 3·1운동은 4월 1일 이기한(李綺漢)[1868~1941]과 이병억(李秉億) 등의 주도로 석송리에서 시작되었다. 이동안(李東案), 정재철(鄭在喆), 남순길(南順吉) 등 20~30명이 적극 동조하여 정안면 소재지인 광정리로 이동하였다. 내송리에서 식수 작업을 마친 운궁리 주민 20여 명도 이에 합세하였다. 시위대는 먼저 사람이 많은 광정시장으로 이동하여 일본인 거주지와 정미소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부른 후에 정안주재소를 공격하였다. 당시 정안주재소 순사들은 공주장터 만세 시위를 막기 위해 파견을 나간 상태였다. 이에 공주경찰서에 구원 요청을 하여 병졸 다섯 명이 광정리로 보내지고 시위대가 있는 석송리 주막 앞에 이르렀다. 석송리 주민들은 군경이 탄 자동차를 보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또 일본 경찰이 주동자를 체포하려고 하자 거세게 저항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총을 발포하여 이병림(李秉霖)[1889~1919]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석송리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된 정안면의 만세 시위 사건으로 판결을 받은 사람은 모두 25명이었다. 이 중에서 이기한, 이동안, 유원식은 중형을 받았다. 광복 후 이기한을 비롯하여 여섯 명이 독립 유공자로 표창을 받았다.
[위치]
석송3·1만세유적지는 공주시 정안면 석송리 33-2 일원에 있다.
[현황]
석송리 만세둑 광장에는 1984년 주민들이 세운 3·1독립만세기념비와 1995년 공주향교 주관으로 세운 공주 3·1만세사적비가 있다. 매년 4월 1일 지역 주민들이 석송3·1만세유적지 앞에 모여 선열의 뜻을 기리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