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89
영어의미역 Pontoon Bridge
이칭/별칭 주교(舟橋),산성교(山城橋)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지도보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다리
양식 배다리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공산성 공북루 앞 구 금강철교 동쪽에 있던 배를 엮어 만든 다리.

[개설]

배다리는 과거에 하천에서 배를 엮어 다리로 이용하던 것이다. 배다리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조선 후기 정조의 화성(華城) 행차를 위해 한강에 설치한 경우가 있다.

일제강점기 공주는 시가지 정비·관청 시설 설치·교통 시설 설치 등 도시 기반 시설을 확충하여 근대 도시로 발달하였다. 그 가운데 교통 시설은 공주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당시 사람과 차량의 내왕이 가장 빈번했던 도로는 전막(금강철교: 공주 구다리 건너편에 위치)을 지나 조치원과 청주로 이어지는 공청가도(公淸街道)였다. 공청가도는 1894년 청일전쟁 시기 전쟁을 목적으로 일제가 급조한 신작로이다. 철도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대개 승합차편으로 이 도로를 이용하여 조치원으로 향했다.

당시 공주의 배다리는 공주 주민들의 주요한 교통 수단이었다. 이 배다리는 일제강점기에 철교로 가설되었다. 그 경위는 1983년 공주농업고등학교에서 발간한 『공주농업고등학교 50년 약사』에 소개되어 있다. 공주공립농업학교(현재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는 공주에 소재했던 충청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하는 결정에 관련하여 유치된 학교이다.

1931년 1월 13일 조선총독부가 충청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공주 시민들은 크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조선총독부가 도청의 대전 이전을 단행하자 도청의 대전 이전 조건으로 공주에서는 금강 배다리를 철교로 가설해줄 것과 농업학교 및 여자사범학교를 신설하여 공주를 교육 도시로 발전시킬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당시 공주 지역민들의 숙원 사업에 대한 보상책의 하나로 1933년 3월 13일자로 공주공립농업학교의 설립이 인가되었다.

[형태]

배다리의 흔적으로 배를 고정하기 위해 설치한 말뚝과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배다리는 1933년 충청남도청 이전의 대가로 금강철교가 부설되기 전까지 공주 주민들의 주요한 교통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