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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89
한자 公州-遺蹟
영어의미역 Pontoon Bridge
이칭/별칭 주교(舟橋),산성교(山城橋),배다리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64-1 일원지도보기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정내수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22년 10월 17일연표보기 - 공주 배다리 유적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34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4년 5월 17일 - 공주 배다리 유적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34호에서 공주시 기념물로 변경
성격 다리
양식 배다리
문화재 지정번호 공주시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공산성 공북루 앞 구 금강철교 동쪽에 있던 배를 엮어 만든 다리의 흔적.

[개설]

배다리는 과거에 하천에서 배를 엮어 다리로 이용하던 것이다. 배다리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조선 후기 정조의 화성(華城) 행차를 위해 한강에 설치한 경우가 있다.

웅진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는 조선시대에는 충청감영이 소재한 곳으로 충청도 지역의 중심지였다. 공주를 관통하는 금강을 건너기 위해 공북루(拱北樓) 앞 금강나루를 이용하였다. 1910년대에 이르면 금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교통시설의 확충이 요구되었다. 일제 강점기 공주는 시가지 정비·관청 시설 설치·교통 시설 설치 등 도시 기반 시설을 확충하여 근대 도시로 발달하였다. 그 가운데 교통 시설은 공주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 당시 사람과 차량의 내왕이 가장 빈번했던 도로는 전막(금강철교: 공주 구다리 건너편에 위치)을 지나 조치원과 청주로 이어지는 공청가도(公淸街道)였다. 공청가도는 1894년 청일전쟁 시기 전쟁을 목적으로 일제가 급조한 신작로이다. 철도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대개 승합차편으로 이 도로를 이용하여 조치원으로 향했다.

당시 공주의 배다리는 금강철교가 설치되기 이전인 1910년대 초부터 1933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공주의 구도심과 강북 일대를 연결해 주는 공주 주민들의 주요한 교통 수단이었다. 이 배다리는 일제 강점기에 철교로 가설되었는데, 그 경위는 1983년 공주농업고등학교에서 발간한 『공주농업고등학교 50년 약사』에 소개되어 있다. 공주공립농업학교(현재 공주생명과학고등학교)는 공주에 소재했던 충청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하는 결정과 관련하여 유치된 학교이다.

1931년 1월 13일 조선총독부가 충청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공주 시민들은 크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조선총독부가 도청의 대전 이전을 단행하자 도청의 대전 이전 조건으로 공주에서는 금강 배다리를 철교로 가설해줄 것과 농업학교 및 여자사범학교를 신설하여 공주를 교육 도시로 발전시킬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당시 공주 지역민들의 숙원 사업에 대한 보상책의 하나로 1933년 3월 13일자로 공주공립농업학교의 설립이 인가되었다.

[형태]

공주 배다리 유적의 흔적으로 배를 고정하기 위해 설치한 말뚝과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공주 배다리 유적는 1933년 충청남도청 이전의 대가로 금강철교가 부설되기 전까지 공주 주민들의 주요한 교통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배다리는 공주의 교통 및 도시 발전사를 설명하는 중요한 자원으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근대 초기 교량의 형태를 보여 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 그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인정되어 2022년 10월 17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기념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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