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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562
한자 中高制-故場-公州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걸재

[개설]

공주는 명창 박동진이동백으로 유명한 판소리의 고장이다. 공주 출신이거나 공주에서 활동한 명창들 중에는 공주와의 연계에 다소 무리가 있는 인물들이 있기는 하나, 일정 기간 공주에서 활동한 인물이거나 공주 출신자들만의 면면만으로도 이들의 판소리가 공주를 중고제의 본산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공주가 충청관찰사의 소재지였다는 지역적 위치가 판소리 문화의 중간 집결지, 즉 호남과 호서 지방의 판소리를 서울로 연결하는 곳으로서의 역할을 했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주 소리판의 특성]

공주 소리판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민요권인 경기 지방의 소리와 판소리권인 남도 소리가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주는 관찰사가 있던 고장으로, 호서 지방의 부자들이 집결되어 있던 지역적 특성이 있어 소리꾼들이 먹고 살기 편한 곳이었다. 이러한 배경이 공주를 동편제나 서편제와 같이 중고제라는 평성의 소리제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음악적 배경은 구한말의 8명창에 속하는 황호통·이동백과 현대 판소리계의 거장인 박동진을 배출한 토양이 되었고, 민요제와 판소리제가 섞인 소리의 토양은 어느 마을을 가든지 옛 소리가 보존되어 쉽게 불리는 형태로 존재하게 만들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공주 일원에서 채록되는 경기민요조의 노래들은 「노랫가락」·「태평가」·「청춘가」·「창부 타령」이 주를 이루고, 「역음수심가」·「담방귀 타령」·「베틀가」·「새 타령」·「범벅 타령」 등이 보이나 가사가 긴 것은 「창부 타령」으로, 짧은 것은 「청춘가」·「노랫가락」으로 불린다.

노래를 부르고 즐기는 데는 타 고장과 같이 한 사람의 뛰어난 소리를 듣고 싶어 하기보다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 노래를 주고 받으며 흐름이 끊이지 않는 형태를 즐김으로써 모든 사람이 함께 흥얼거리는 흥을 중요시 하였다.

판소리조로 채록되는 노래들은 단가가 주류를 이루며 판소리는 많지 않다. 더구나 판소리 완창은 다른 지역과 같은 현상이지만, 대부분 판소리 중 몇 소절을 부르는 사람이 재인 대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생활권으로 형성된 마을에는 그 마을을 대표하는 소리꾼이 있어 제자를 받아들여 소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공주인들이 즐겨 불렀던 단가는 「만고강산」·「한평천지」·「백발가」·「곡우천변」·「호서가」·「공명가」·「쑥대머리」·「오륜가」 등이며, 「부귀공명사」·「목련가」 등은 재인들에 의해 불리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인들이 가장 즐겨 불렀던 판소리는 「춘향전」으로 보이며, 이 중에서도 춘향이가 매를 맞는 대목인 「십장가」는 현재도 부르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만큼 흔하다.

[중고제 중심의 명창을 찾아서]

우리는 흔히 명창이라는 말을 쓴다. 넓은 의미로 명창이란 노래를 잘하여 이름난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좁게는 판소리를 잘하여 이름난 사람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성씨에 명창을 더하여 김명창·박명창이라고 부르는데, 한 가지 유의하여야 할 것은 오명창은 오씨 성을 쓰는 명창을 이르는 말이 아니고 다섯 사람의 명창(이동백·김창용·정정렬·송만갑·유성준)을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명창 중에서 세 명(이동백·김창용·정정렬)이 공주 출신이거나 공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일제강점기 문화 말살 정책 이전 시기에 공주의 판소리가 얼마나 왕성한 활동을 보였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공주에서 활동하며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던 인물들은 오명창의 활동기 이전부터 있어 왔고, 그 인물들의 수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국창이라는 칭호를 써도 부끄럽지 않을 박동진이 판소리 대가가 될 수 있었던 중요 토양이 되었던 공주의 판소리 인물들을 살펴보는 것은 공주의 소리 문화를 파악하는 데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것이다.

[딴청일수, 고수관]

고수관은 조선 순조·철종 때 팔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해미에서 출생하고 공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여 전국적인 명창 호칭을 얻은 사람이다. 목소리가 아름답고 여러 목청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딴청일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재효의 『광대가』에서도 고수관의 구수하고 은근한 창법을 백낙천의 시 세계와 견주어 볼 만 하다고 칭찬하였다. 특히 「춘향전」의 자진 사랑가는 고수관이 처음 시작하여 송만갑·전도성 등과 같은 명창에 의하여 현재까지 전래되어 불리어지며 생활이 담백하여 제자들에게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도처춘풍, 정춘풍]

정춘풍은 판소리 하나로 ‘도처춘풍’이라는 말을 유행하게 했던 명창이다. 동래정씨 양반 가문 출신으로 헌종 때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 벼슬을 얻었으나, 판소리를 익혀 명창이 되었다. 학식이 있어 구전으로 전해지던 판소리 가사를 정리하는 업적을 남겼다.

공연을 하면 인기가 좋아 소리하는 곳마다 사람이 몰려 ‘전라도의 신재효’ ‘충청도의 정춘풍’으로 일컬어졌다. 정춘풍은 명창의 반열에 올라 서울에서 활동하기 이전에는 대부분 공주에서 활동하였다. 「적벽가」를 특히 잘하였으며, 「적벽가」 중 제갈공명이 비를 부르는 대목에서 축문을 사용한 첫 번째 인물로 유명하며, 단가 「소상팔경」은 정춘풍의 작품 「더늠」이다.

[호통같은 목소리, 황호통]

황호통은 공주 출생(소계고개 아랫마을, 현 신기2구로 추정)으로 조선 고종 때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다. 본명은 전하지 않고 평상 시 목소리가 호통을 치는 것과 같이 우람하다 하여 얻은 별명이 호통이라 한다. 본래 계룡면 신기리 소재고개 아랫마을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연명하던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목소리가 좋아 김정근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이날치·정창업 등과 교류하면서 견문을 넓혀 중고제 판소리의 판을 완성했다고 한다.

공주에서 노래를 할 때, 선화당에서 노래를 하면 계룡면까지 30리 안 모든 사람이 소리를 들었다는 소문이 있다. 「춘향가」와 「심청가」를 특히 잘했다. 아들 황운열은 아버지에게 판소리를 배워 소리꾼으로 활동하였으나, 명창의 칭호는 얻지 못했다. 더욱이 무너미고개 아랫동네(현 계룡면 봉명리 추정)에서 살면서도 공주의 대표적인 친일파요 갑부였던 김갑순의 사랑방에 머물면서 소리를 하여 공주인들에게 좋은 평은 듣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중고제 마지막 명창, 김석창]

조선 순종 때의 판소리 명창으로 공주 출신이다. 특히 아니리를 잘하고 판소리의 가락 변화 기법의 하나인 부침새에 능하였다. 이동백보다 20년 정도 연상으로 1840년대 출생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출생과 사망은 알지 못한다.

이동백과 함께 서천 비인현에서 공연하였는 데, 공연 후 김석창에게는 100냥을 주고 이동백에게는 15냥을 주자 이동백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100일 독공을 하게 하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중고제 마지막 명창으로 일컬어지나, 이는 이동백·박동진으로 이어지는 명맥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 같다.

[앉아서 소리하던 명창, 김성옥]

강경에서 출생하여 공주에서 활동한 조선 순조 때의 명창이다. 진양조 장단을 처음으로 판소리에 응용하여 송홍록에게 사용하게 하였다. 송홍록의 매부로 송홍록은 대외적으로 활동하고 김성옥은 앉아서 노래를 하였다. 이로 인하여 “서서 노는 송홍록, 앉아서 소리하는 김성옥” 이라는 말이 있었고, 말년에 거동이 불편하여 “앉아서 노래를 너무하여, 다리가 붙었다” 는 말이 돌 만큼 노래에 심오한 열정을 쏟았다. 아들 김정근과 손자 김창용이 모두 명창으로 3대 명창 가문을 이루었다.

[김성옥의 아들, 김정근]

김성옥의 아들로 철종고종 때 활동한 명창이다. 「무숙이 타령」으로 이름을 얻고 「흥부가」의 삼공제비곡조를 창시하였고, 연습을 너무 많이 하여 목이 넘어 소리를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만큼 몰입하였다. 문하에 이동백과 아들 김창룡을 명창으로 길러내어 더욱 유명하다.

[참봉 벼슬 받은 김창용]

1872년 출생하여 고종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약한 4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서천군 횡산에서 출생하여 공주에서 활동하다가 서울로 올라가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은 3대 판소리 명문가의 명창으로, 중고제 소리를 완성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하였다. 동문 이동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소를 만들어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적벽가」와 「심청가」를 특히 잘하였다. 고종 앞에서 노래를 불러 참봉 벼슬을 하사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김정근의 아들, 김창진]

김정근의 둘째 아들로 김창룡의 동생이다. 형이나 아버지와는 달리 공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명창의 호칭은 얻지 못하였으나, 이동백·박동진으로 이어지는 중고제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박동진과는 사돈지간으로 공주에서 활동을 많이 했으며 박동진이 소리에 입문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박동진의 스승, 정정렬]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명창이다. 전라북도 익산 출신이다. 7세에 정창업 문하에, 14세에 이날치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공부하였으나, 두 사람이 모두 죽고 나서 충청도로 올라와 판소리를 공부할 때, 공주를 활동 근거지로 하여 40세 마산으로 옮기기까지 활동하였다.

이동백박동진의 판소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박동진의 스승이었다. 전국적으로 명창의 칭호를 얻은 후에 이동백·김창진과 함께 조선성악연구소를 설립하였고, 「춘향가」에 능했다. 탁한 목이면서도 끈질기게 노력하여 50세에 명창의 반열에 오른 것으로 유명하다.

[어전 명창, 이동백]

1897년 서천 비인에서 출생하여, 1950년까지 생존한 조선 말기 5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8세에 서당 공부를 하고, 13세에 판소리에 입문하여 김정근·김세종 문하에서 공부하고 20세에 2년간 혼자 공부하였다. 그 후 진주 이곡사에서 3년 독공에 들어가기 전까지 공주에서 충청남도 일원을 근거로 활동하였다.

김석창·박동진과의 인연이 이때 이루어졌고 일부에서는 공주인으로 알만큼 공주와 인연이 깊다. 풍채가 당당하고 목소리가 좋아 거인 명창으로 통했으며, 특히 고종의 사랑을 받아 통정대부 품계를 받고 어전 명창으로 활동하였다. 「적벽가」와 「심청전」을 잘했으며 새 타령을 잘한 것으로 이름이 높은 이동백은 공주 활동 시절, 김석창과의 서천 비인현 공연에서 남긴 일화는 유명하다.

선천현감의 요청으로 김석창과 공연하였는 데, 공연 후 현감이 김석창에게는 100냥을 주고, 이동백에게는 15냥을 주었다. 비인이 고향인 이동백은 이를 크게 분해하며 15냥 전부로 독을 사다가 현청 앞에 세워 놓고 몽둥이로 남김없이 깨뜨렸다. 자신의 분을 그것으로도 달래지 못한 이동백은 소리로 김석창을 능가하겠다는 결심으로 진주 이곡사로 들어가 1000일 독공을 하였다. 그러나 3년 독공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미 김석창이 사망한 후여서 통곡했다 한다. 박동진을 특히 아껴 많은 소리를 가르쳐주고 격려하였다.

[제비 몰러 나간다, 박동진]

공주시 장기면에서 1916년 출생하여 국가지정 국가무형문화재 제8호(판소리 「적벽가」)로 지정된 명창이다. 박동진은 김창진·정정렬·유성준·조학진·박지홍에게 사사하고도 오랜 독공으로 소리를 익혔으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문화 말살 정책을 피하여 판소리를 지켜내는 데 기여하였다.

박동진은 마디 소리로 불리우던 대부분의 판소리를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완창을 몸소 실천하였다. 「홍보가」(5시간), 「춘향가」(8시간), 「심청가」(6시간), 「변강쇠 타령」(5시간), 「적벽가」(7시간), 「수궁가」(5시간) 등을 완창하여 후학들이 완창을 목표로 판소리를 부르는 풍토를 창시하였다. 박동진은 창작 판소리에도 많은 심혈을 기울여 성서 판소리 4시간을 비롯하여 「숙영낭자전」, 「성웅 이순신 장군」, 「팔려간 요셉」, 「옹고집전」 등을 판소리로 노래하여 현대적인 의미의 판소리 중흥을 이루어낸 인물로 국창의 칭호에 부끄럽지 않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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