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609 |
---|---|
한자 | 孝子黃春檍旌閭 |
영어의미역 |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Hwang Chuneok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중뜸길 99[성리 177-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고순영,박범 |
성격 | 정려 |
---|---|
양식 | 팔작지붕 |
건립시기/일시 | 1921년![]() |
정면칸수 | 1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중뜸길 99[성리 177-1]![]() |
소유자 | 장수황씨 첨화휘근공파 |
관리자 | 장수황씨 첨화휘근공파 |
문화재 지정번호 | 공주시 유형문화유산 |
문화재 지정일 | 1997년 6월 5일![]() |
문화재 지정일 | 2024년 5월 17일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성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의 효자 황춘억의 정려.
[개설]
황춘억(黃春檍)[1639~1710]은 방촌 황희(黃喜)[1363~1452]의 7세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매우 지극했다고 하며, 부친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자르고 그 피로 목숨을 살렸다. 모친이 삼복더위에 신열이 나자 강에서 직접 고기를 잡아 올려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하였다. 노부모의 진짓상에 고기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여 매일 산에서 꿩을 잡아 드렸다고 한다. 부모의 상중에는 밤낮을 바리지 않고 곡을 하여 3년 동안에는 비린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부모님의 머리카락을 옷에 넣고 다닐 정도로 부모님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위치]
공주에서 부여로 가는 국도 40호선을 따라 17㎞ 정도 가다 보면 탄천면소재지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 부여 방면으로 500m 정도 더 가면 성리에 도착하게 되는데, 도로변 왼쪽에 효자 황춘억 정려가 있다.
[변천]
황춘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739년(영조 15) 공주의 유학 유정 등 57명이 공주목에 정표 포장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주목에서 이를 충청감영에 보고하여 1742년(영조 18) 효행으로 통선랑사헌부지평(通善郞司憲府持平)에 증직었으나 정려는 1921년에 건립되었다. 같은 해 윤두병(尹斗炳)이 지은 「황효자정려기(黃孝子旌閭記)」에 경제적인 이유로 정려를 곧바로 세우지 못했다고 나온다. 현재의 정려는 1962년에 중수되었다. 1739년(영조 15) 공주에 거주하는 유학생들이 황춘억의 효행 사실을 알린 등장(等狀)이 보관되고 있으며, 1742년(영조 18) 효행이 뛰어난 황춘억을 통선랑사헌부지평(通善郞司憲府持平)으로 삼은 증직교지가 남아 있다.
[형태]
효자 황춘억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사면에는 홍살이 둘러져 있다. 정려 내에는 ‘효자증통훈대부사헌부지평황춘억지려영묘조임술오월일명정(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持平黃春檍之閭英廟朝壬戌五月日命旌)’이라고 쓰인 명정 현판과 1921년 윤두병이 지은 「황효자정려기」가 있다. 한편 정려 정면에는 근년에 세운 효열부의 기적비 2기가 있다.
[현황]
효자 황춘억 정려는 1997년 6월 5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13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의의와 평가]
공주 지역에 거주했던 유학 50여 명이 정려 포장의 은전을 내려줄 것을 청원했던 등장과 증직교지가 후손들에 의해 잘 보관되고 있어 공주 지역 유생들의 활동 상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