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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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子鄭以載旌閭 |
영어의미역 |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Jeong Yija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삼각아랫말길 24-1[삼각리 산81-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박범 |
성격 | 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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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우진각 지붕 형식 |
건립시기/일시 | 1720년![]() |
정면칸수 | 1칸 |
측면칸수 | 1칸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삼각아랫말길 24-1[삼각리 산81-1]![]() |
소유자 | 조만홍 |
관리자 | 조만홍 |
문화재 지정번호 | 공주시 유형문화유산 |
문화재 지정일 | 1997년 6월 5일![]() |
문화재 지정일 | 2024년 5월 17일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삼각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정이재의 정려.
[개설]
정이재(鄭以載)[1654~1689]는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그의 나이 13세가 되었을 때 모친이 병에 걸리자 밤낮으로 병석을 지키며 간호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병환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드리며 모친을 소생시키기도 하였다. 정이재의 이러한 효심을 때문에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손가락을 자른 자리의 색이 변하는 등과 같은 기이한 일이 생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이재의 깊은 효심 덕분에 신이 감동한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부친이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는데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였다. 정이재는 강으로 갔으나 강물이 모두 얼어서 잉어가 보이지 않았다. 정이재가 차가운 강변에서 주저앉아 있는데 갑자기 강의 한쪽에서 얼음이 녹아 잉어가 튀어 올랐다. 이후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으며 피죽만으로 목숨을 연명하다가 삼년상을 마친 이후 기력이 쇠약해져 세상을 떠났다.
[위치]
공주에서 부여 방향으로 가는 국도 40호선을 따라 16.5㎞ 가면 탄천면소재지가 있다. 탄천면소재지 도로 오른쪽에 있는 탄천초등학교와 탄천중학교 사이에 있는 언고개 길로 약 1㎞ 정도 들어가면 도로 왼편에 효자 정이재 정려가 있다.
[변천]
효자 정이재 정려는 정이재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720년(숙종 46) 명정을 받아 건립되었다. 건립 이후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 중수는 이교년(李喬年)이 지은 「중수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중수는 1760년(영조 36) 정이재의 아들인 정인언(鄭麟彦)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정려가 퇴락하여 아들인 정인언이 재물과 재목을 구하여 중수하였다. 1812년(순조 12)에는 건물이 낡아지자 증손인 정홍검(鄭弘儉)에 의해 다시 중수되었다.
이후 1947년 윤정중(尹正重)이 지은 「중수기」에 의하면, 7세손 정홍조(鄭洪朝)가 중수를 하려다가 성사시키지 못한 것을 손자 정상모(鄭尙謨)가 완수하였다고 한다. 박중현(朴重絃)이 지은 「중수기」에는 정홍조의 아들 정인태(鄭寅台)가 완성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에 이미 한 차례의 중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효자 정이재 정려는 1999년 중수되어 지금에 이른다.
[형태]
효자 정이재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사면에 홍살을 둘렀다. 정려 중앙에 ‘효자정이재지려숭정기원후재경자정월일명정(孝子鄭以載之閭崇禎紀元後再庚子正月日命旌)’이라는 내용의 명정 현판이 있고, 주위에 4기의 「중수기」가 걸려 있다. 효자 정이재 정려 옆에는 3·1운동 당시 활약한 정이재의 7세손 정홍조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손자 정성모(鄭聖謨)가 건립한 기념비가 있다.
[현황]
효자 정이재 정려는 1997년 6월 5일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의의와 평가]
정이재는 어려서 윤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동래정씨인 정이재의 가문과 정이재의 부인 파평윤씨의 인연으로 정려 중수 때 파평윤씨들이 중수기문을 써주는 등 두 집안이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