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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599
한자 孝子吳壽爀旌閭
영어의미역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O Suhyeok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기산리 40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순영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려
양식 맞배지붕
건립시기/일시 1782년연표보기
정면칸수 3칸
측면칸수 1칸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기산리 408 지도보기
관리자 오세곤
문화재 지정번호 공주시 유형문화유산
문화재 지정일 1997년 6월 5일연표보기
문화재 지정일 2024년 5월 17일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기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오수혁의 정려.

[위치]

공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국도 23호선을 따라 6㎞ 정도 가면 계룡면 소정마을에 이르게 된다. 효자 오수혁 정려는 이 마을의 입구에 있다.

[변천]

오수혁(吳壽爀)은 해주오씨 오한영(吳漢英)과 공산이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특히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매일 모친의 인분을 맛보아 병세를 확인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어머니에게 드려 목숨을 수일간 연장시키는 등 극진히 간호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효성을 인정받아 1782년(정조 6) 동몽교관에 증직되고 명정을 받았다. 효자 오수혁 정려오수혁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782년(정조 6)에 명정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이규헌(李圭憲)이 지은 「효자오공정려중건기(孝子吳公旌閭重建記)」에 의하면, 1894년(고종 31) 갑오농민군에 의해 정려가 불타 없어져 오랫동안 재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54년 6세손 오윤환(吳潤煥)이 정려의 옛 터에 오수혁의 현손인 오시영(吳時泳)과 5대손인 오용근(吳用根)의 양대 효행비를 추가로 건립하였고, 1964년에 오수혁의 정려비와 정려각을 다시 세웠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4년에는 공주유도회의 주도로 오수혁의 증손 오필선 처 광산김씨의 절행비까지 추가로 세워졌다. 현재의 효자 오수혁 정려는 1998년에 후손들이 마을 입구에 있던 정려를 중앙으로 옮기며 보수한 것이다.

[형태]

효자 오수혁 정려는 정면 3칸, 측면 1칸이고, 지붕은 한국 전통 건축 양식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앞뒤로만 경사진 형태의 맞배지붕 양식이다. 비각의 전체적인 구조는 자연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우고 사면은 홍살로 처리하였다. 정려 정면에는 ‘오문양세효자비(吳門兩世孝子碑)’라는 현판이, 정려 내부에는 1964년 이규헌이 쓴 「정려중건기」가 걸려 있다. 현판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불타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정려 내부 왼쪽에 있는 효자 오수혁의 정려비 앞면에는 1782년에 효자로서 통훈대부동몽교관에 증직된 오수혁의 정려임이 기록되어 있다. 즉 ‘효자증통훈대부동몽교관해주오공수혁지려(孝子贈通訓大夫童蒙敎官海州吳公壽爀之閭)’라고 되어 있다.

정려 중앙에는 1954년에 후손들이 세운 ‘오문양세 효자비(吳門兩世孝子碑)’가 있고 오른쪽에는 1974년에 세워진 광산김씨 절행비(光山金氏節行碑)가 있다. 비문은 임헌문(林憲文)이 지었고, 후손인 오윤환이 글씨를 썼다. 정려 앞에는 1998년 7대손 오세걸(吳世杰)이 기록한 연혁비가 있다.

[현황]

효자 오수혁 정려는 1997년 6월 5일에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1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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