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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1595
한자 孝子金永聲旌閭
영어의미역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Gim Youngseong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대룡리 473-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순영박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려
양식 초익공 팔작지붕
건립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정면칸수 1칸
측면칸수 1칸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대룡리 473-1 지도보기
소유자 관산김씨 종중
관리자 김선갑
문화재 지정번호 공주시 유형문화유산
문화재 지정일 1997년 6월 5일연표보기
문화재 지정일 2024년 5월 17일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대룡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김영성의 정려.

[위치]

공주터미널에서 국도 32호선을 따라 예산 방면으로 20㎞ 정도 가면 신풍면소재지에 약간 못 미쳐 청양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에서 청양 방면으로 3㎞ 정도 더 가면 도로 왼쪽에 대룡초등학교가 있다. 효자 김영성 정려는 대룡초등학교에서 대룡2리로 들어가는 마을 길을 따라 300m 정도 더 들어간 곳에 있다.

[변천]

김영성(金永聲)은 1818년(순조 18) 김구현(金九鉉)과 인동장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효행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해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한겨울에 오이를 구해 봉양했으며, 아버지가 아프면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나온 피로 연명케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3년간 예를 다해 시묘살이를 한 사실이 조정에까지 소문날 정도의 효자였다. 조선시대에는 충효가 두드러진 인물을 매년 예조에 보고해 정려 등을 하고 도덕 규범을 확립해 사회를 교화하는 것이 이상으로 여겨졌다.

효자 김영성 정려도 효자 김영성(金永聲)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71년(고종 8)에 명정을 받아 건립되었다. 김영성이 정려를 받은 과정은 「예조입안」에서 일부 확인이 가능하다.

그 내용을 보면, 김영성은 1869년(고종 6)에 효행으로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는데, 1871년 충청도 진사 홍상학(洪相鶴) 등이 어가(御駕) 앞에서 김영성의 효행 사실을 알리면서 정려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명정을 내리고 재목과 목수를 보내 정려의 건립을 돕도록 하였으며, 그 후손들에게는 각종 세금과 잡역을 감면해 주도록 하였다.

1871년 처음 정려가 창건된 시기부터 1981년 사이에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효자 김영성 정려는 1981년에 일부 보수한 것이며, 1995~1996년에 공주시의 지원으로 단청을 다시 하였다.

[형태]

현재의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고 지붕은 조선 후기 사찰, 정자 등의 건축물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식으로 네 방향에 경사가 있어 여덟 개의 지붕면이 생기는 형태인 초익공 팔작지붕 양식이다. 앞면은 홍살이 둘러져 있고, 양 측면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정려 중앙에는 1871년에 명정받은 효자 김영성의 정려임을 알려주는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김영성지문상지팔년(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金永聲之門上之八年)’이라고 쓰인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아래에는 1981년 정려를 중수하면서 증손 김찬중(金瓚中)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비석에는 1871년 김영성이 명정을 받을 당시 문서를 그대로 새겨 놓았다.

[현황]

효자 김영성 정려는 1997년 6월 5일에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제25호로 지정되었다가 2024년 5월 17일 조례에 따라 공주시 유형문화유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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